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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정보/역사

인디오와 콜럼버스



  15세기가 다가오던 1492년에 카리브해역에서 일어난 한 사건, 곧 콜럼버스와 섬 주민들과의 만남으로부터 모든 문제는 시작된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대서양 서쪽에서 '발견'한 토지와 주민을 각각 인디아(아메리카대륙), 인디오(중미·남미의 인디언)라는 이름으로 일방적으로 싸잡아버리고 그곳에 불행과 비찬의 씨를 뿌린 침략의 선도자 콜럼버스를 이니오들이 환영했을리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우리들의 생각과는 다른 사실을 말해주는 자료가 있다.


  콜럼버스가 제 1차 항해시에 쓴 항해일지를 기초로 1552년경 라스 캐사스라는 사람이 편저한 [항해지]가 그 가운데 하나이다. 콜럼버스가 이것을 남긴 데는 그에 상응하는 고도의 정치적 판단이 있었겠지만, 우리는 이 일지 곳곳에서 콜럼버스가 카리브해역의 섬 주민들에게 얼마나 환영받고 협력을 받았는지를 읽을 수 있다. 거의 100일에 걸친 장기간의 카리브해 주변 항해는 그러한 협력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후에 인디아 각지에서 외부 유럽인을 괴롭힌 '식량위기'가 이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인디오들은 또 기함 산타마리아호가 좌초되었을 때 전력을 다해 정연하게 구조체제를 갖춤으로써 콜럼버스를 감탄시켰다. 그것은 콜럼버스에게만 그치지 않았다. 일지를 필사한 라스 캐사스(그때 이미 섬주민은 저의 절멸된 상태였다)는 이 대목에 이르러 무심코 난외에 이렇게 써놓았다. "인디오들을 근절시켜버린 폭도들(그 선두를 달린 콜럼버스)에 비해 이때 그들이 보여준 인도주의 정신에 주목하라"고.


  이러한 양자의 우호관계를 뒷받침하는 사실은 또 있다. 인디오가 환영한 것은 콜럼버스만이 아니었다. 그의 뒤를 이어 인디아로 향했던 아메리고 베스푸치, 카브랄, 카르티에 등 이른바 발견자들의 기록은 그들이 먼저 위해나 공격을 가하지 않는 한 각지에서 인디오의 환대를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로부터 약 1세기 후 스페인의 지배망에 대항해 주로 북미 동해안에 식민지 기지를 획득하려고 했던 영국인과 프랑스인의 기록에도 역시 같은 내용이 나타나 있다.


  결국 문제는 이렇게 하여 시작된 우호관계가 왜 깨졌는가를 아메리카대륙의 역사 속에서 찾아내고 그 의미를 되새겨보는 것이다. 표면상의 과정만을 본다면 콜럼버스 이후 인디아에서 일어난 일은 상호불신과 배반, 무역항쟁뿐이다. 결과적으로 카리브해 인디오의 사멸과 대륙의 파괴가 진행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럽을 유일한 주체로 하는 식민사회가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이 역사의 발단을 응시했던 동시대인 라스 캐사스는 말한다. 처음에 인디오로부터 인간적인 응대가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배반한 스페인인 기독교도(유럽인)들의 부정하고 불법적인 폭력이 각지에서 뒤를 이었으며, 아메리카의 역사를 해독하는 열쇠는 바로 이 불과 30년 동안에 나타난 역사적 관계에 있다고.


  오랜 세월에 걸쳐 인디오를 둘러싼 가혹한 정치현실과 정면으로 대결했던 라스 캐사스가 만년에 저술한 [역사서]에서 내용의 대부분을 콜럼버스의 일을 규명하는 데 할애한 것도, 그 시점이 바로 아메리카대륙의 이후 역사(세계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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