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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정보/역사

한·중·일이 자연과 마주하는 법 동양의 자연은 서양의 위압적이고 스케일이 큰 거대경관이라기 보다는 ‘산수경관’이라 할 만큼 인간 삶의 척도에 맞춘 휴먼스케일을 선호한다. 특히 한·중·일 삼국의 정원에는 자연을 대하는 태도의 같고 다름이 잘 나타난다. 중국의 대표적 ‘강남지방 정원’은 구불구불한 인공적 곡선으로 이루어진 연못이 정원의 기본 틀이다. 연못 주변 회백색의 굵은 선은 주로 기괴한 돌을 겹겹이 쌓은 태호석(太湖石)이 대표적 재료다. 그리고 중간 중간 전망 좋은 곳에 정자를 놓고 정원을 둘러보기 좋도록 기와지붕으로 된 긴 복도를 연결한다. 나무는 배경용으로 일부가 사용된다. 일본의 고산수(枯山水) 정원은 방장(方丈)의 뒷마당에 물을 사용하지 않는 직사각형의 모래정원을 만들던지, 아니면 건물 주변에 구불구불한 곡선형의 연못을 만들고.. 더보기
여장 성곽, 면장 성곽 한양도성이나 수원화성과 같은 성곽을 보면, 들쭉날쭉 요철(凹凸)로 된 나지막한 담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는 이것을 ‘여장(女墻)’이라 한다. 장(墻)은 ‘담’을 뜻하는 것이므로 이해되는데, 왜 ‘여(女)’를 붙여 ‘여장’이라고 했을까. 중국 명나라 때 백과사전인 『삼재도회(三才圖會)』와 중국 후한(後漢, 서기 25~220년) 말기에 만들어진 사전인 『석명(釋名)』에 그 답이 있다. 이 책에 의하면, ‘성 위에 있는 담을 비예(睥睨)라 하며 가운데 빈 공간이 있어 비상(非常)한 것을 살펴보게 하는데, 아래의 높은 성에 비하여 높이가 작아, 마치 키가 큰 남자와 키가 작은 여자와 같아서 이를 여장이라고도 일컫는다. (若女子之於丈夫也)’고 되어 있다. 여장은 성곽에서 매우 중요하다. 성 자체가 외부로부터의 침.. 더보기
경주 월성 해자 개훍서 건진 1500년 전 신라 생활상 ‘해자(垓子)’는 궁성 밖 둘레에 파 놓은 물도랑으로 외부의 침입을 막는 방어시설을 일컫는다. 신라 천년을 지속했던 궁성인 경주 월성(月城)에도 ‘해자’가 있었다. 월성해자는 1984년 월성 주변지역 시굴조사를 통해 그 실체가 드러났으며, 최근 발굴조사를 통해 전모가 확인되었다. 특히 이번 월성해자 발굴조사에서는 신라시대의 생활과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많은 양의 유물이 쏟아져나와 주목되고 있다. 발굴 전 해자 내부에는 두껍게 개흙이 남아있었다. 개흙(뻘층)은 미끈미끈하고 고와서 밀도가 높아 외부의 산소를 차단시킨다. 그래서 그 내부에는 보통의 발굴조사 현장이라면 썩어서 이미 흔적없이 사라져버렸을 수많은 유기물과 유기물로 만든 유물이 남아있었다. 바닷가의 갯벌을 ‘생명의 보고’라고 일컫는 것처럼 발굴조사.. 더보기
백제인이 열광했던 명품 희소하며 아름답고 고가의 물품으로 가진 자의 사회적 지위를 견주어 물건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것을 우리는 ‘명품’이라고 일컫는다. 백제인에게도 명품이 있었으니 바로 ‘중국산 자기(磁器)’이다. 백제는 고대국가를 세우기 이전부터 중국과 활발하게 교역을 했는데, 많은 교역품 중에서 자기에 대한 수요가 높았다. 이국적인 아름다운 문양적 요소와 당시 백제에는 없던 유약 바르는 기술로 매끄러운 감촉을 지닌 자기는 백제인들에게 매력적인 물품이었다. 백제 상류층들은 중국의 선진문화에 대한 동경과 그것을 향유할 수 있는 세력이라는 자부심이 결부되어 자기의 수요를 독점하다시피 하였다. 자기의 인기는 지방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왕이 지방의 신하에게 회유와 영향력 강화의 목적으로 주는 선물로 자기가 이용되었다. 발굴을 통해 지.. 더보기
어둠을 밝히는 동굴 연구자들 우리 사회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극도로 힘든 작업환경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극한의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 EBS의 ‘극한 직업’이다. 극한의 환경에 마주한 분들이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모습과 그 과정에서 발휘되는 불굴의 의지와 끊임없는 도전, 열정, 동료애 등의 모습은 직업정신의 가치를 다시금 되돌아보게 된다. 필자처럼 지질유산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사람들 중에도 극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 분들이 있다. 바로 동굴 연구자들이다. 이들은 절대적 어둠 속에서 작은 손전등과 밧줄하나만 가지고 적게는 수일에서 길게는 수개월에 걸쳐 지하 속 세상을 조사한다. 머리하나 들어가는 좁은 바위틈을 비집고 다녀야하며, 차가운 물속을 거닐거나 가파른 암반을 오르고 내리는 일을 수 없이.. 더보기
춘향전의 최고 수혜자 남원 ‘광한루’ 서양의 ‘로미오와 줄리엣’ 에 견줄만한 우리 것은 단연코 ‘춘향전’이다. 조선후기 작자미상의 판소리와 소설로 전래되면서 근대시기를 거쳐 현재까지도 대중들의 사랑을 끊임없이 받고 있다. 소설 말미에 과거급제 사실을 속인 채 춘향이를 구해내는 극적 반전과 광한루(廣寒樓)와 오작교(烏鵲橋), 그네 등 소설 속 무대가 되었던 곳들도 제법 인기를 끄는 데 한몫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황희 정승(1363~1452)이 남원으로 유배오면서 건립된 광통루(廣通樓)가 광한루원(廣寒樓苑)의 전신에 해당한다. 이후 전라감사 정철과 남원부사 장의국이 부임하면서 광한루를 중수하였는데, 요천강을 끌어 호수를 파고 삼신산과 오작교를 조성함으로서 정원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1444년에는 남원부사 유지례에 의해 당시 황무지였던 광한루.. 더보기
광화문의 추억 광화문에 가면 나는 남다른 추억이 떠오른다. 2007년, 지금으로부터 꼭 10년 전의 일이다. 그 당시 광화문은 1968년 복원된 것으로 경복궁의 정문임에도 불구하고, 그 위치나 각도가 틀어져 궁궐의 축과 맞지 않았다. 그래서 광화문의 위치를 찾아 새로 복원하는 프로젝트가 한창이었다. 그 당시 나는 광화문의 "제 위치"를 찾는 임무를 띠고 발굴조사를 담당했다. 발굴조사는 문헌기록을 바탕으로 기존 위치보다 약 11m 남쪽, 즉 당시 차들이 쌩쌩 달리던 세종로 아스팔트 아래를 대상으로 하였다. 모두가 이미 없어졌을 거라 비관했지만, 결과는 대반전이었다. 광화문의 기초석과 월대 기단석이 고스란히 발견된 것이다. 확인된 광화문의 규모는 약 30×15m에 이르고, 돌과 흙을 번갈아 쌓은 기초의 두께가 약 2m에 .. 더보기
그림과 책이 입는 옷 ‘장황’ 박물관에 전시된 초상화를 보면 그림이 그려진 화면의 사방을 두르고 있는 비단이나 종이가 있다. 이처럼 그림과 서책을 감상하거나 보관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종이와 비단 등으로 보강하여 꾸며주는 것을 ‘장황(裝潢, 粧䌙)’이라고 하는데, 현대에는 ‘표구(表具)’라는 용어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장황’은 예로부터 사용해 오던 용어이다. 우리나라 조선왕조실록이나 의궤 등의 문헌에는 ‘裝潢’, ‘粧䌙’, ‘裝䌙’ 등의 한자로 기록되어 있는데, 장황이 잘못되어 다시 재장황한 기록, 장황에 사용되는 나무, 비단, 금박 재료 등 다양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이처럼 그림이나 서책은 그 감상방법이나 형태, 용도 등에 따라 다양한 형식으로 장황되어진다. 서책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인쇄술의 발전과 함께 여러 가지 형태를 .. 더보기
가슴 벅찬 감동 고구려 고분벽화 “다양한 선과 형태가 한데 어울려 가슴 벅차게 다가오면서 위대한 걸작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압도감으로 황홀해졌다. 먹색의 장엄한 윤곽선 속에 붉은색, 노란색, 녹색의 간단한 물감을 칠했을 뿐인데 여기서 오는 진실감과 사실성은 이집트 고분벽화와 비교할 수 없다” 6.25전쟁의 포화가 한창이던 1951년, 화가 정현웅(1911~1976)은 고구려 고분벽화를 모사하면서 느낀 소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캄캄한 고분 속에서 때로는 축축한 바닥에 넘어지고 때로는 촛농이 종이 위에 타들어간 열악한 조건이었지만, 육체적․정신적 고통도 이겨낼 만큼 눈앞에 펼쳐진 고구려인의 숨결은 가슴 벅찬 감동 그 자체였다. 정현웅이 모사한 벽화는 황해도 안악1․2․3호 무덤과 평안남도 강서무덤이었다(사진). 고구려 고분벽화 중에서도 당대.. 더보기
조선 중기 소통․조화의 상징, 홍화문 한국 전통건축의 대표적 특징 가운데 하나는 공간의 흐름이다. 대문, 마당, 마루, 방은 시각적으로 이어지면서 완전히 단절되지 않고 다양한 공간을 연출한다. 이러한 공간의 연결과 조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문(門)이다. 성곽에는 크고 작은 대문이 있고, 한양도성에는 성 내부를 보호하면서도 외부와 소통하는 문으로 4대문과 4소문이 있다. 향교와 서원 앞에는 홍살문이 있어 여기서부터 유학(儒學)의 장소임을 알린다. 절 입구에는 일주문(一柱門), 천왕문(天王門)이 있어 이곳부터가 불교의 도량임을 알린다. 궁궐에도 동서남북에 문이 놓이는데, 특히 남쪽에 놓인 문을 정문(正門)이라 한다. 경복궁의 광화문, 창덕궁의 돈화문, 창경궁의 홍화문이다. 이들의 건축 형식은 약간씩 다른데, 광화문이 홍예문을 갖춘 돌로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