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11월 오스트리아와의 휴전으로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대전의 중압에서 해방되었다. 전승국이긴 했지만 국민의 생활은 고달팠다. 물가는 네배 이상 오르고 노동자의 임금은 전쟁 전의 60퍼센트였다. 농민은 여전히 가난했다. 러시아혁명의 성공은 노동자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생활향상을 목표로 하는 파업이 잇따라 전후 2년 사이에 3,544건, 참가자만도 230만명에 달했다. 노동자의 거점 토리노에서는 노동자에 의한 공장점거가 이루어졌다. 말 그대로 '붉은 2년'이었다. 이런 가운데서 1차대전중 반전의 입장을 일관되게 견지했던 이탈리아사회당은 1919년 2월의 국회선거에서 156석을 획득하여 제 1당으로 진출했다.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서 혁명적 위기를 느낀 자본가는 공업경영자연맹을 조직하여 반격에 나서 1920년 9월 노동자의 공장점거를 막아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지배계급인 자본가, 지주 및 그들을 대표하는 정당은 이 혼란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출구를 찾아내지 못했다. 전쟁에서 돌아온 병사들은 직업을 잃은 채 거리에 방치되어 있었다. 정부는 연합국이 약속한 '미회수 이탈리아'의 영토 회복을 전면적으로 완수할 수 없었다. 이탈리아국민들 사이에는 불만이 가득 쌓이고 환멸감이 퍼져갔으며 정부의 무능을 추궁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불만의 배출구로서 폭력을 용인하는 분위기가 계속 번져나갔다. '전투파쇼'가 밀라노에서 결성된 것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였다. 무솔리니를 지도자로 하는 200명 남짓한 소집단은 반 년 후인 1919년 10월, 피렌체에서 전국집회를 열고 1만 7천 명의 구성원을 획득하였다. 민중의 불만이 집중되어 있는 전시이득과 교회재산의 몰수, 공화제 등을 슬로건으로 내거는 한편 '러시아의 앞잡이' 사회당에 대한 증오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는 아직 '검은 셔츠(무솔리니가 이끄는 이탈리아 파시스트당의 다른 이름, 검은 셔츠를 제복으로 입은 데서 이렇게 불렀다)'의 전투파쇼는 국회 선거에서 한 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한 소집단에 불과했고,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한 줌 소집단이 지나지 않았던 전투파쇼가 1922년 10월의 '로마진군'에서 어떻게 권력을 획득할 정도로 급성장하였던 것일까. '로마진군'으로 전투파쇼는 전국에서 3,424개의 지부와 30만의 당원, '검은 셔츠 부대'라는 군사행동부대를 가진 파시스트당으로 성장하였다(전국대회는 1921년 11월). 이때 파시스트당은 이탈리아 지배계급의 정당들로 구성된 국민블럭(275석)의 일원으로서 국회에 35개의 의석을 가졌다. 파쇼가 보수당과 국민블럭을 구성한 것은 보수당의 최대지도자 졸리티의 '파시즘으로 사회주의를 제압한다'는 구상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곧 이탈리아의 지배층은 파시즘을 이용하여 '혁명적 위기'를 회피하려 했던 것이다.
전투파쇼는 이런 지배층의 기대에 완전히 부응했다. 전투파쇼의 중핵부대는 1921년부터 심각해진 이탈리아의 경제위기, 불경기, 실업자 증대 등의 영향을 받아 불만이 가중된 중간층·하층 농민이었고, 귀환병들에 의해 군대식으로 조직되었다.
전투파쇼는 농촌지대에서 볼로냐, 페라라 등 사회당 세력하에 있는 북이탈리아 여러 도시의 좌익 및 노동조합 사무소와 시설을 습격하여 다수의 사망자를 내는 등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다. 이런 행동이 북이탈리아에서 중부 이탈리아로 확대되었지만 군대와 경찰, 관공서는 이를 묵인했다.
이런 파시스트의 움직임에 대항해 노동자들이 인민돌격대를 조직하여 방위함으로써 이탈리아는 내란상태에 돌입했다. 그러나 1921년 사회당은 세파로 분열되었고 새로 생겨난 공산당 역시 반파쇼통일행동을 조직하지 못했다. 하층민의 불만을 이용한 파쇼의 폭력적 습격은 이탈리아 각지로 들불처럼 번져가고 노동자는 마음대로 날뛰는 거친 폭력 속에서 괴로움의 날들을 보내야 했다.
1922년 10월 파시스트는 국회에서 소수의 의석밖에 가지고 있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주변에 의용군단을 배치하고 쿠데타의 위협을 가함으로써 공공연히 정권을 요구하였다. 국왕은 파시스트가 공화제의 슬로건을 철회하고 왕제를 인정하였기 때문에 국군에 의한 진압을 중지하고 무솔리니에게 조각을 명했다. 이로써 파시스트를 수반으로 보수파를 포함한 내각이 성립되었다. 파시스트는 기성권력의 동의를 얻어 '혁명'을 달성하고, 이탈리아는 4년에 걸친 격동과 혼미에 종지부를 찍고 '안정'을 찾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20년에 걸친 파시스트 독재의 길을 여는 최악의 해결방식이었다. 독재체제 아래에서 정당은 해산되고, 언론·사상의 자유는 빼앗겼으며, 이탈리아국민은 오로지 '믿으라, 복종하라!'에 굴복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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