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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정보/역사

의화단 운동



  서양 기독교의 중국 진출을 반대해서 일어난 구교운동은 1860년대 이래 중국 전역에서 발생했다. 1895년 청일전쟁 이후 외국상품의 유입이 급증하면서 중국농민의 몰락은 가속화되었다. 외제상품의 유입과 이질적 문명의 침략 아래 생활고와 사회불안에 쫓기는 유민층은 날로 늘어만 갔고 이들의 태도는 점차 배외성(拜外性)을 띠어갔다. 나아가 열강의 중국주재 기관은 물론 이를 저지하러 나선 지방관헌과 이들의 대결양상이 나날이 뚜렷해졌다.


  1889년 진강(鎭江), 1891년 무호(蕪湖), 단양(丹陽), 무석(無錫), 남창(南昌), 특히 강서, 하남, 안휘, 산동성 등 4(四省) 지역에서는 대도회(大刀會)를 중심으로 배외의식이 강한 비밀결사세력이 강화되어갔으며, 1896 4월 강소성 석산현의 독일계 교회 교민들이 지방창고의 곡식을 빼앗아간 사건을 계기로 공개적인 구교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897년 독일의 교주만 상륙은 중국민중의 배외의식을 더욱 자극하게 된다.


  한편 1897 8, 황하가 범람함에 따라 황하 중하류 및 화북지방에 굶주리는 사람이 늘었고, 대운하의 운송에 종사하던 사람들 가운데 실직자가 대량으로 발생하였다. 또한 서양상품의 침입에 따라 수공업자 가운데도 몰락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이렇게 발생한 유민과 빈민, 그리고 실업자 가운데는 호신술의 일종인 권()과 봉()을 구사하는 의화권이라는 조직이 세력을 확대하며 활동하고 있었다. 이의 기원은 19세기초까지 거슬러올라가며 이후 계속 대도회와 함께 구교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이들은 외세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폭리를 탐하는 지주와 고리대업자들에게도 공격의 화살을 돌려 지주들의 무장단체인 단련(團練)과도 싸웠다.




  1897년 독일의 외상 게오르그의 보고서에는 중국 진출(침략)의 중요성이 나타나 있으며, 이에 따라 결국 독일은 중국의 교주만을 조차한다. 제국주의 열강에 의한 중국분할은 가속화되었으며 여기서 교회는 제국주의의 이해를 대표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때 지주 및 관신(官紳) 계급을 중심으로 애국구망운동(愛國救亡運動)이 전개되기도 하지만 민중의 혁명적인 열기를 두려워한 나머지 민중들과의 결합을 회피하고 단지 상서(上書), 출판, 언론에만 전념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1898 4월 산동성 서북부와 하북성 남부를 중심으로 의화권의 투쟁은 가열되었다. 이에 산동 순무(巡撫)는 의화권을 단련의 하나로 인정하였고 수구파(양이파)는 이 의화단을 양이에 이용하려 하였다. 의화단의 투쟁력에 놀란 청나라 정부는 1899 4월 이후 의화단의 무력투쟁에 대해서는 집중적인 탄압을 가하는 한편 부청멸양(扶淸滅洋, 청을 돕고 외국을 멸한다)을 슬로건으로 내세우도록 회유한다. , 지배계급과의 통일전선을 형성하게 함으로써 합법적 투쟁을 허용한 것이다. 그러나 지배계급의 봉건성과 매판성을 거부하는 의화단의 민중적 성격은 결코 퇴색하지 않았다.


  1900년 의화단운동은 산동성에서 하북으로, 그리고 운하를 따라 각 지역으로 확대되어갔다. 3월 하순에는 천진에 진출하였고, 6월에는 제국주의의 상징인 북경을 향해 진격하였다.


  투쟁의 성격도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구교운동에서 철도파괴로 옮겨지는 등 질적인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철도는 제국주의 침략의 중심체로서, 특히 경진선과 노보선은 영국·러시아·프랑스에 의해 건설된 제국주의와 매판세력의 상징물이었던 것이다.


  1900 4월에 들어서면서 의화단은 조직적으로 정착하게 되었고, 관료의 회유와 설득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투쟁대열에 나선 농민을 지도하면서 더욱 강화된 조직력을 보였다. 제국주의세력은 의화단에 의해 고립된 북경을 다시 빼앗고자 천진을 공격하고 북경으로 향하였다. 청의 서태후정부는 1900 6 21일 의화단의 힘과 양광총독 이홍장, 야강총독 유곤일의 힘에 의거하여 마침내 제국주의에 선전포고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의화단의 투쟁은 민족방위전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8 14, 8개국 연합국은 2만의 병력(이 중 절반이 일본군이었음)으로 북경을 공격, 공사관의 포위망을 풀었다. 결국 청조는 연합국세력에 굴복하였고 다시금 의화단 진압에 나서게 된다.


  1901 8개국 연합국은 청과 신축조약(북경의정서)을 체결하여 북경에 외국군대의 주둔과 그 공사관구역 설치를 허용하고 해관세와 염세를 담보로 4 5천만 냥의 배상금을 지불하게 하는 한편 의화단의 두목을 처벌하도록 했다.

  의화단 투쟁은 열강의 군사적 압력에 굴복한 청조와 양무파가 중심이 된 정부의 상층 매판관료 및 동요된 수구파가 합세함으로써 무너지고 말았으나 청일전쟁 이후 열강의 중국분할에 일정하게 쐐기를 박는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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