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히비냐 공원 한쪽 구석에는 한 필리핀 독립영웅의 비석이 있다. 비문에는 '필리핀의 국민적 영웅 호세 리살 박사, 1888년 이곳 도쿄 호텔에 묵다. 1961년 건립'이라고 쓰여 있다. 호세 리살이 도쿄 호텔에 체재한 것을 기념하여 정원에 세웠던 비를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호세 리살은 1861년 필리핀의 라그나 주 칼랑바 시에서 태어났다. 리살 가문은 도미니크회 소유의 토지를 빌려 대규모의 농업을 하고 있었다.
필리핀은 스페인의 식민지였다. 스페인은 '한 손에는 십자가, 한 손에는 검'을 들고 필리핀을 지배했다. 스페인 본국으로부터 파견된 한 총독은 말했다. "인디언(스페인 사람들은 필리핀 사람들을 이렇게 불렀다)에게는 잠시라도 시간을 주면 안된다. 쉴 틈을 주지 말고 매일매일 억압을 가해 괴롭히는 편이 좋다."
필리핀 사람들의 저항은 끊이지 않았다. 1872년 1월 한 해군 병기공장에서 필리핀 노동자와 병사가 사소한 항의를 했다. 당국은 이를 반란으로 규정하고 탄압했을 뿐 아니라 배후로서 필리핀인 신부 고메스 등을 지목하여 체고, 공개처형했다.
이 사건은 필리핀인에게 큰 충격과 자각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리살은 열한 살 짜리 소년이었지만 형으로부터 이 이야기를 듣고 큰 영향을 받았다.
이 해에 리살은 마닐라로 가 예수회 학교에 입학했다. 16세 때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리살은 성 토마스 대학에 진학했다. 1879년 18세때 는 '필리핀 청년에게 보냄'이라는 제목의 시를 써서 문학작품 공모전에 1등으로 당선되기도 했다. 그 시에서 리살은 우리의 조국은 필리핀이라고 역설하면서, '청년들이여 무거운 쇠사슬을 깨뜨리고 속박에서 벗어나자'고 부르짖었다. 스페인을 조국으로 불러야 했던 당시로서 이는 가히 혁명적인 언사였다.
리살은 이로써 스페인 당국으로부터 주목을 받는 인물이 되었다. 1882년 리살은 스페인으로 향했다. 마드리드 중앙대학에서 공부하고 베를린과 파리에서 유학했다. 철학·문학·의학, 나아가서는 조각·회화·외국어를 공부했다.
1887년에 리살은 소설 [놀리 메 탄게레('나에게 손대지 말라')]를 써서, 가톨릭 수도회가 필리핀에서 휘두르고 있는 막강한 권력과 그에 의해 희생되어가는 섬 주민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렸다. 스페인 당국은 이 책을 발매 금지했고 필리핀 국내에서 이것을 읽는 사람은 모두 체포하였다.
그해 8월 리살은 마닐라로 돌아왔다. 유럽에서 배운 최신 의학으로 어머니의 눈 수술에 성공한 뒤 그는 진료소를 열고 학교를 세워 농촌문화 개발에 나선다. 그러나 리살의 행동을 불온하게 본 수도회는 그에게 계속 압력을 가해왔고, 점차 신변에 위험이 닥쳐오자 그는 1888년 2월에 다시 조국을 떠나게 된다.
홍콩으로 피한 리살이 일본에 들른 것은 1888년 2월 28일 아침이었다. 요코하마 그랜드 호텔에 머물렀던 리살은 곧 스페인공사관으로 불려가 도쿄로 압송된다. 리살이 도쿄 호텔에 체류한 것은 3월 1일부터 7일까지였으며, 3월 8일부터 스페인 공사관 직원의 주거로 옮겨진다.
4월 13일, 리살은 요코하마에서 배를 타고 미국을 향해 출발했다. 그 배에서 리살은 일본의 한 작가를 만나 자신의 운명을 이야기 했고, 이 작가는 귀국 후 리살의 이야기를 담은 정치소설을 펴냈다.
1891년 리살은 두번째 소설을 출판했다. 스페인 관헌들에게 그것은 매우 위험한 사상으로 비쳤다. 1892년 4년 만에 귀국한 리살은 '필리핀 동맹'을 결성하였다. 결성 후 4일째 되는 날 리살은 체포되어 산티아고의 요새에 감금되었다가 다피탄 지방으로 추방되어 4년간을 보낸다. 1896년 리살은 쿠바에서 의사로 생활하고 싶다고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리살의 생명을 앗아갈 씨앗이 이미 필리핀 사회에서 자라고 있었다. 8월 26일에 무장봉기가 일어나자 리살은 그에 관계한 혐의로 다시 체포되어 12월 30일 총살형에 처해진다. 그의 나이 36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