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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정보/역사

산업혁명의 변화



  18세기 후반 남잉글랜드의 시골에서 자연관찰을 계속하면서 [셀본 박물지]라는 서간집을 완성한 길버트 화이트는 1778년의 편지에서, 당시 한센병(나병) 환자가 감소된 사실을 언급하면서 그 이유를 다음 네 가지로 들었다. 첫째, 소금에 절인 고기 대신 신선한 생육을 먹게 된 것, 둘째, 오랫동안 피부에 직접 닿아 더럽고 불결한 모직물 대신 파스티안직 셔츠와 속옷을 입음으로써 청결하게 된 것, 셋째, 보리·콩으로 만든 변변치 못한 빵 대신 밀빵이 널리 청결하게 된 것, 넷째, 지방뿐 아니라 도시에서도 과일·야채의 양과 종류가 늘어났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농업 혁명의 성과가 상당히 널리 미쳤다는 점을 추측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농업혁명의 성과가 상당히 널리 미쳤다는 점을 추측할 수 있다. 중세 이래의 개방농지제하에서는 겨울에 사육하는 가축의 수가 여름 동안 만든 건초의 양에 의해 제약되었기 때문에 필요한 가축 외에는 처분하여 소금절이 고기로 만들었다. 그러다가 무와 클로버를 도입한 신농법 덕택에 겨울이 와도 가축을 모두 사육할 수 있어 항시 신선한 식육을 공급받을 수 있게 되었다.


  야채 ·과일의 양과 종류가 늘어났다는 화이트의 기록을 좀더 보충해보자. 당시의 일기와 편지 등 기록 여기저기에 보이는 주요한 야채에는 양배추·양파·당근·무·래디쉬·오이·컬리플라워·양상치·서양호박·강낭콩·완두콩 등이 있고, 과일로는 사과·자두·배·버찌·오렌지 등이 있다. 그러나 18세기에 가장 급속히 보급된 야채는 감자로, 화이트도 이 지방에서 경작이 시작된 것은 20년 전에 불과하지만 지금은 대단히 많이 퍼져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감자는 18세기초에는 잉글랜드 북서부 일부에서만 재배되다가 세기말에 이르러서는 전국에서 생산되었고, 도시노동자의 가계부에서 절대로 빠질 수 없는 야채가 되었다. 이처럼 농업혁명은 국민의 식생활을 질과 양 모두에서 향상시켰다.


  식료 및 일용잡호가 영국 내에 널리 퍼진 것은 교통·운송수단의 발달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것은 먼저 도로의 개선과 포장, 마차의 증대와 능률화로 시작되어 18세기 후반에는 운하가 개통되기에 이르렀다. 운하를 이용한 선박편은 마차보다 속도는 늦었지만 운반하는 양이 많았기 때문에 일반서민의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컸다. 예를 들면 그랜드트렁크 운하(1777년 완성)에 대해 한 시인은, “이 운하 덕택에 볏짚과 띠풀 지붕이 웨일즈 등에서 운반된 타일이나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었고, 배수와 비료 보급에 의해 황무지는 옥답이 되었으며, 석탄을 몰랐던 가정에도 석탄이 보급되고 곡물이 대량으로 운반되어 상인의 독점이 무너지고, 사람들은 싼 빵을 살 수 있게 되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러나 영향력 면에서는 철도에 앞서는 것이 없었다. 철도에 의해 물자가 국내 각지로 퍼지고 그와 함께 지방에 따라 상당한 격차가 있었던 물가가 평준화되었다. 일용품이 대량으로 운반되자 이제까지 주 1회 열리는 주시나 일년에 한 번 열리는 대시(大市)에서 생활필수품을 조달하던 지방에도 상설점포가 생겼다. 사람들은 쉽고 편리하게 물자를 구입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구입할 수 있는 상품의 종류도 늘어났다.


  철도는 물자운송만이 아니라 인간의 이동도 용이하게 했다. 철도가 가진 장점에 재빨리 눈을 돌린 토마스 쿡이라는 사람은 1845년 레스터에서 리버풀까지 철도 단체여행을 기획하여 큰 이익을 올렸다. 1851년 런던박람회 때에는 북부·중부의 노동자를 대상으로 철도요금을 할인해주는 단체여행을 조직하여 십수만 명을 런던으로 보냈다(이것이 현대 세계 유수의 여행사 토마스 쿡의 기원이다). 그들 대부분에게 런던 여행이란 꿈도 꿀 수 없었던 일이었다. 동시에 아무리 싼 가격의 할인이라 하더라도 십만 명 이상의 노동자와 그 가족이 런던으로 며칠간의 관광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그들의 생활에 여유가 생겼다는 뜻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간편해진 여행은 다른 한편으로 인구의 도시집중에 박차를 가했다. 런던은 언제나 사람들을 끌어들였지만 철도의 시대가 되자 그 경향은 더욱 강해졌다. 또 맨체스터, 리버풀, 버밍엄 등의 신흥도시에도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그 결과는 슬럼가의 발생이었고, 그것은 엥겔스가 맨체스터에서의 견문을 토대로 쓴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비참하기 그지없는 생활이었다.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의 극빈생활이 산업혁명과 함께 시작된 것은 아니다. 그 이전에도 도시와 농촌을 불문하고 최하층 사람들의 생활은 항상 비참했다. 그러나 도시의 인구증대와 더불어 도시빈민층이 늘어나고 슬럼가가 두드러지게 된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그들에 대한 구제의 문제는 커다란 사회문자로 떠오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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