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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정보/역사

고려대장경이 일본으로 간 까닭은?



  경상남도 가야산에는 유명한 사찰인 해인사가 있다. 이곳에는 13세기에 만들어진 대장경 판목 팔만 천여 매가 보관 되어있다. 긴 참배길이 끝나면 오른쪽으로 일주문이 서 있고, 길은 오른쪽 경사면을 올라간다. 봉황문·해탈문·구관루를 통과하면 중앙에 절의 중심부인 본당에 해당하는 대적광전이 있다. 그 뒤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가로로 긴 건물 두 채가 연달아 늘어서 있다. 앞쪽의 수다라장전, 안채가 법보전으로 경판은 그 안의 선반에 빈틈없이 채워져 있다.


  이 경판각은 14세기말에 창건된 것으로 통풍과 방습을 고려하여 지은 이상적인 건축이라 한다. 경내에서 가장 안쪽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일곱 번의 화재에도 수난을 면했다. 최근 정부에서 현대적 기술을 구사하여 새로운 경판각을 짓고 보존에 만전을 기하였는데, 이상하게도 갑자기 경판에 벌레가 생겨 부득이 원래대로 되돌렸다 한다.


  이 경판과 경판각은 한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문화재로, 각각 국보 32호와 5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대장경이 어떤 동기에서 만들어졌으며 이웃나라인 일본에 어떻게 전해질 수 있었는지 알아보자.


  대장경이란 불교경전을 망라한 총서로, 목판인쇄는 송대 초엽부터 이루어졌다. 서기 971, 송의 태조는 촉나라(사천성)에 대장경을 새길 것을 명해 983년에 완성했다. 이것이 북송칙판, 개보(송의 연호), 촉판 등으로 불리는 최초의 판본 대장경이다. 이 대장경은 통일왕조의 새 출발을 과시하는 한편 불법을 널리 알린다는 숭고한 임무를 띠고 있었으므로, 일본·동여진·서하·고려 등 주변 여러 나라에 전파되었다. 고려에는 990년경에 전해졌다.


  고려는 이를 본보기로 하여 독자적으로 대장경을 조판했다. 이 사업은 1011년부터 시작하여 1087년에 완성되었고, 곧 이어서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 내외로부터 수집된 불서들이 속장경으로 간행되었다. 이것이 고려초고본대장경이다. 고려는 11세기초에 두 번에 걸쳐 거란의 침략을 받았고, 대장경 조판은 불법의 힘으로 침략을 물리치고자 했던 데서 이루어진 것이다. 초고본의 형태는 한 장에 각 행 14자씩으로 23행을 수록한 권자본(두루마리 모양의 옛책)으로 북송칙판을 답습했다.




  경상북도 부인사에 안치되어 있던 초고본 판목은 1232년 몽골군에 의해 불타버렸다. 같은 해 난을 피해 강화도로 천도한 최씨 무신정권은 침략군의 격퇴를 기원하기 위해 즉각 복원에 착수하였고, 1236년부터 햇수로 16년을 들여 1251년에 완성했다. 이것이 고려재조본 대장경으로 그 판본은 조선 성립 후 해인사로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판갈이가 진행된 시기는 몽골이 고려의 전 영토를 수없이 침범하였을 때이다. 그러한 수난의 시대에 팔만여매의 판각을 완수한 저력은 결코 범상한 것이 아니다.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은 고려시대 불교신앙의 강렬함과 그 호국적 성격을 잘 말해주고 있다.


  재조본의 형태도 초고본·북송칙판을 답습하여 한 장에 한 행 14자로 23행을 수록한 권자본이다. 목록에 의하면 대장경은 628, 1,524, 6,558권으로 되어 있다. 조판할 때 초고본, 북송칙판, 거란장경, 고사본 등을 대조하여 엄밀한 교정을 거쳤으며 그 결과는 [신조대장교정별록] 30권에 정리되었다. 재조본의 경문은 놀랄 만큼 정확하여 일본의 [대정신수대장경]을 출판할 때도 이것이 기본판으로 채용되었다.


  14세기말 이래 서일본에서는 대장경을 구하기 위해 앞다투어 조선으로 건너오게 된다. 1388년 승려 두 사람이 왜구의 포로로 있던 250명을 돌려보내는 대가로 대장경을 요구한 것을 비롯하여 1539년까지 150년 동안 알려진 것만도 50부 이상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는 왜구가 날뛰어 골치를 앓던 조선과, 자력으로는 대장경을 간행할 수 없었던 일본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조선에서는 유교를 국시로 삼으면서 불교를 배척하게 되어 애써 만든 대장경도 무용지물이 되었으므로 대국의 위엄을 과시하는 선물로 쉽게 내주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 유품들이 일본 각지의 절에 남게 되었다. 왜구의 위협이 극심했던 15세기 전반에는 수많은 일본인이 대장경을 입수할 수 있었다. 상인·호족·주지 등이 앞다투어 대장경을 요구하였고 심지어 판목 자체의 양도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왜구의 세력이 약해진 15세기 후반이 되면 조선의 통장세한정책이 대장경에도 미쳐 일본 오키나와 번주와 고급 관리, 대마도 번주 이외에는 대장경을 구할 수 없게 되었다. 더욱이 1510년 삼포의 난 이후 조·일 관계가 급속히 쇠퇴하면서 대장경을 구하기는 거의 불가능해졌고, 1539년 일본에서 일체경이 나온 후로 대장경을 얻으려는 노력은 자취를 감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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