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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정보/역사

클레오파트라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 프톨레마이오스가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이집트에 창건한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여왕을 칭하는 이름이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이 왕가 최후의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기원전 69~30년, 재위 기원전 51~30년)이다. 그녀의 이름은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세계 역사는 변했을 것'이라는 경구로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이 유명한 경구는 17세기의 과학자이며 철학자인 파스칼의 유작 [팡세] 중에 나온다. 파스칼로부터 뭔가 심오한 진리를 배우고자 하는 진지한 독자라면 클레오파트라의 코에 대한 이야기를 그냥 흘려버릴 것이고, 또 클레오파트라에게 호기심을 가진 사람이 [팡세]를 읽은 경우도 그리 흔치는 않을테니 실제로 클레오파트라의 코에 대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다. 하여간 이 파스칼의 경구는 그것이 포함된 장 전체의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클레오파트라의 코에 관한 내용이 담긴 문장은 다음과 같다.


  "인간의 헛됨을 완전히 알고 싶은 사람은 연애의 원인과 결과를 생각해보기만 하면 충분하다. 원인은 '나도 모를' 그런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끔찍하다. 이 '나도 모를', '사람들이 인식할 수도 없을 만큼 사소한 것들이 온 땅과 군주, 군대, 전 세계를 움직인다. 클레오파트라의 코, 그것이 조금만 낮았더라면 지구의 모든 표면은 바뀌었을 것이다."


  이렇게 전체를 인용하면, 인간의 허영과 비참함을 통찰할 뒤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로 평했던 파스칼의 격언으로서 앞뒤가 맞는다. 그러나 철인이 아닌 범인인 이상 이야기의 줄거리에 따라서 클레오파트라의 콧날을 그냥 지나쳐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클레오파트라의 코와 용모의 실상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그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동시대의 작품까지 포함하여 이 여왕의 조상(彫像)으로 전해지는 것이 몇 개 있긴 하지만 어느 것이 가장 그녀의 모습에 가까운지 단정할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로마의 영웅 카이사르나 안토니우스를 순식간에 반하게 할 정도의 수려한 코와 경국지색이라 할 만한 미모를 상기시키는 걸작은 현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또 하나의 문제를 제기해보다. 클레오파트라는 과연 소문난 만큼 절세의 미인이었을까? 의외로 이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고전의 서술은 일치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성 중 절세가인', '수많은 남자가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그녀의 사랑을 얻으려고 할 정도의 미인' 등 최상급 형용사를 바치고 있는 것은 비교적 후대의 필자들이다. 그에 비해 1~2세기초의 문인이지만 클레오파트라와 동시대의 신뢰도가 높은 자료에 근거했다고 생각되는 플루타르크의 [안토니우스전]에는 "그녀의 실제의 미모 그 자체는 결코 누구나 경탄할 만큼 그렇게 두드러진 것은 아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미모라는 점에서만 본다면 그녀와 안토니우스의 정숙한 아내 옥타비아(옥타비아누스의 누이) 중 누가 더 낫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것. 플루타르크는 그러나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그녀와의 교제는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대화시의 설득력 있는 태도와 함께 주위 사람을 향기롭게 감싸는 태도는 뭔가 강렬한 자극을 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현악기와 같이 감미로웠고, 또 그리스어밖에 하지 못했던 프톨레마이오스왕조 시대의 군주들과는 달리 피지배자의 언어, 이집트어는 물론 많은 언어에 통달하여 어떤 민족과도 통역 없이 대화했다고 전해지는데, 다소의 과장을 감안하더라도 뭇사람의 신망이 그녀에게 모였던 것은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재색이 타고난 것이든 습득된 것이든 간에 이미 많은 여인들을 거느린 바 있는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를 끌어들인 요인이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두번이나 자신들의 영웅을 빼앗긴 로마인이 그녀를 '요부', '나일의 마녀'로 욕한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그렇다면 클레오 파트라는 미인계로 로마의 일류 장군들을 끌어들여 기울어가는 이집트를 지키고 헬레니즘 세계제국을 건설하려고 의도한 여장부 였을까? 여왕으로서 그녀가 정치와 밀착했던 것은 사실이었겠지만 카이사르, 특히 안토닛우스와의 연애를 단순한 정치적 거래수단으로만 보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 그녀는 로마의 영웅들을 만날 때마다 몸을 바쳐 스스로를 불태웠다. 그래서 여왕의 고귀한 최후에는 로마 작가 호라티우스조차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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