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인디언 가운데 유일하게 좋은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뿐이다." 이는 코만치 인디언의 우두머리가 1869년 붙잡혔을 때 "나는 좋은 인디언이다"고 말한 데 대해 필립 세리던 장군이 대답한 말이다.
이 표현은 당시의 평균적인 미국인의 감정을 잘 대변하였던 것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인용되었고, 인디언 토벌을 정당화하는 전형적인 표현이었다.
미국은 건국 당시 흩어져 살고 있던 인디언부족들과 조약을 맺고 토지를 양도받는다는 원칙을 취했다. 각지의 요새로 또는 수도 워싱턴에싸지 인디언 대표를 초청하여 조약을 맺었다. 이러한 교섭시에 인디언은 자신들의 집단을 하나의 '국가(nation)'라 부르면서 대등한 입장에 서고자 했다.
미국의 역사를 통해 273개의 조약이 각 인디언과의 사이에 맺어졌지만 최종적으로 지켜진 조약은 하나도 없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미국인의 서부개척사는 인디언의 입장에서 본다면 백인들의 배신의 역사이다.
그 상징적인 예로 1830년 잭슨 대통령에 의해 제정된 인디언 강제이주법을 들 수 있다. 당시 동남부에는 체로키, 세미놀, 쿠리크, 치카소, 촉트 등의 인디언 종족이 살고 있었으며 그들 모두는 미국정부와 평화공존을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인디언기 사는 조지자, 앨라배마, 미시시피의 주정부는 연방정부가 맺은 조약을 무시하고 인디언이 사는 토지로 침입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강제이주법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평화공존이 인정되지 않은 채로 각 인디언들은 선조의 토지를 떠나 지정된 미시시피강 서쪽(현재의 오클라호마)까지 이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최후까지 버티며 미국정부와 절충을 벌였던 체로키족도 1838년 10월 미국 군대의 지휘 아래 서부로 비참한 이동을 개시했다. 그들은 다음해 3월 간신히 목적지에 도달했는데, 총인원 약 1만 2천 명 가운데 4천 명이 도중에서 생명을 잃을 정도로 추위와 기아, 병, 미국 군대의 폭행 등에 시달렸다. 훗날 이 이동을 '눈물의 길(Trail of Tears)'이라 불렀을 만큼 인디언은 비참한 운명을 감수해야 했다.
그 후 1848년 캘리포니아에서 황금이 발견되고 골드러시 물결이 서부 각지로 밀려오자 한때 인디언의 토지로 보장되었던 곳에 백인 개척지와 광맥을 찾는 사람들이 거리낌없이 들어왔다. 미국 군대가 인디언의 토지에 대한 권리를 지키려 한 예도 극히 드물지만 인디언과 맺은 조약은 결국 모두 휴지조각이 되어버리고 군대 역시 인디언 토벌을 목적으로 하게 되었다.
1864년 11월 콜로라도 준주에서 일어난 군대의 인디언 학살사건은 영화 [솔저 블루]로 소개되기도 했다. 그 후 각지에서 막다른 곳까지 몰린 인디언들이 저항을 시도했지만 1890년 운디드 니의 학살사건을 마지막으로 인디언의 조직적 저항은 모두 끝났다.
이리하여 인디언은 서부개척을 방해하는 미개인으로서만 그려지게 된다. 미국인은 자신의 문명만을 척도로 하여 인디언을 미개인으로 취급하고 특정거류지로 몰아넣는 정책을 취했다. 1960년대에 들어와 '레드 파워'운동을 일으킨 인디언들은 평등한 권리를 주장하며 지금도 복권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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