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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정보/역사

하와이 왕국 통일



  호놀룰루시 시가지 관청가의 한 구석에 서 있는 카메하메하 1세 대왕의 동상은 하와이의 관광명소 가운데 하나로 되어 있다. 동상이 세워진 것은 1883, 대왕이 죽은 지 60년 남짓 지난 무렵이다. 동상의 얼굴도 포즈도 모두 훌륭하지만 본인과는 조금도 닮지 않았다. 사실적인 초상화가 많이 남아 있었을 텐데 무시했던 모양이다.


  동상 앞쪽에는 빅토리아양식의 이오라니궁전이 위용을 자랑하는데 이 역시 하와이관광의 볼거리로서 동상과 같은 시기에 완성되었다. 제작자는 모두 제7대 하와이국왕 케알라케쿠아(재위 1874~91)였다.


  케알라케쿠아왕은 파격적인 비용을 들여 완성한 이 궁전에서 1883년 성대한 대관식을 거행하고, 그에 맞춰 초대국왕 카메하메하 1세의 동상을 세웠다. 동상 제작은 이탈리아 피렌체의 한 공방에 맡겨졌다. 고대 로마풍으로 완성된 동상은 빅토리아풍의 궁전을 좋아하는 발주자에게는 만족스러운 솜씨였다. 케알라케쿠아의 이러한 유럽취향은 시조 카메하메하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흔히 카메 하메하로 발음하지만 카 메하메하가 맞다. ‘는 접두어, ‘메하는 고독 내지는 정숙이라는 뜻이다. 카메하메하 대왕, 곧 고독 또는 정숙의 왕은 그 무렵 군웅할거하고 있던 하와이제도를 제패하여 통일했기 때문에 그 이름조차 신비하게 들린다.


  카메하메하는 1758(1753, 또는 55, 56년이라는 설도 있다) 하와이섬 북단의 코하라산 깊은 곳에 비밀리에 만들어진 초가집에서 태어났다. 폭풍우가 치는 밤이었지만 갓난아기의 목숨을 노리는 추격자가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자는 더욱 깊은 밀림 속의 동굴로 숨어 화를 면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하와이섬의 실력자 아라파이누이왕의 일족이었는데 아버지가 마우이섬의 왕이었으므로, 이 아이의 존재가 장래 하와이섬에 대한 마우이왕의 세력확장을 야기할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목숨을 건진 카메하메하는 성장함에 따라 두각을 나타내어 하와이섬 실력자의 한 사람이 되었고 이윽고 섬 전체를 장악했다. 그 뒤 아버지의 일족을 자신의 핏줄인지 모른 체 멸망시킨 후에야 처음으로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하와이는 1778년 쿡 선장의 내항을 계기로 유럽 근대문명의 혜택을 받게 되었다. 그 충격을 자기의 세력확대를 위해 최대한 이용한 것이 고독·정숙의 왕이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한 발로 수많은 적을 쓰러뜨리는 화기의 위력이었다. 그는 그것을 두려워하면서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대량의 화기를 사들이는 동시에 영국인 존 영 등 수십 명의 외국인을 고문으로 채용해 실전에서 화기에 의한 전술을 지휘하게 했다. 아버지일족에 승리한 것도 이 전술의 덕택이었다. 이리하여 1795년에는 카우이아이섬을 제외한 전 하와이제도를 제패, 카메하메하왕조를 열고 스스로를 1세로 칭하였다. 화기를 입수한 때로부터 15년 가량 후의 일이다. 1810년에는 카우아이섬의 왕까지 귀순하여 하와이제도는 모두 이 왕조하에 통일되었다.


  결국 하와이왕국은 총구로부터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화기를 매개로 영국측에서 하와이의 영국령화를 획책했다고도 하고 카메하메하측에서 그런 요청을 했다고도 하는데, 어느 쪽이 맞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정작 그것이 실현되지 않았지만 카메하메하의 만년인 1816년에 제정된 하와이왕국의 국기 도안에 유니언 잭(영국 국기)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보면 얼마간 그런 움직임이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이상하게도 이 국기는 미합중국 하와이주가 된 현재까지도 주기(州旗)로 그대로 쓰이고 있다.


  카메하메하가 무기를 구입하는 데 쓴 재원은 당시 하와이에 군생하고 있던 백단향이라는 향내 나는 나무였다. 중국에 백단향 수요가 많다는 것을 영국인 고문으로부터 들은 카메하메하는 중국수출을 독점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백단향은 속속 화기로 대체되었고, 무분별한 벌목으로 인해 19세기 중반쯤에는 하와이의 백단향이 거의 절멸될 지경에 이르렀다.


  백단을 대신하여 하와이의 특산물이 된 것은 설탕이다. 19세기 중반 무렵부터 사탕수수의 플랜테이션 재배가 급격한 속도로 진행되었는데, 이는 주로 미국자본에 의한 것이었다. 케알라케쿠아왕의 호화로운 궁전과 대관식은 플랜테이션으로부터 거둔 세금을 재원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익의 대부분은 미국자본으로 빨려들어갔고, 케알라케쿠아는 그 국물을 얻어마신 데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되자 하와이의 정치도 미국자본이 마음대로 지배하게 되었다. 왕권은 후퇴하고, 하와이정부의 주요직책은 미국이 정치가가 장악하여 왕은 서명만 하는 입헌군주가 된 것이다. 입헌군주제라고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하와이의 미국령화로 한 걸음 내딛은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다음 국왕이 된 릴리오칼라니여왕(케알라케쿠아의 누이동생, 재위 1891~93)이 왕권의 부활·강화를 꾀했지만 미국의 무력에 의해 무너짐으로써 하와이 최후의 국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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