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시스 그랜트는 1822년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가죽가공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대체로 평범하였으나 말을 잘 다루었다. 3D 업종이었던 가업을 물려받길 원하지 않았던 아들에게 아버지는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할 것을 권유했고, 그랜트는 이를 받아들였다.
1843년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뒤 보병연대에 배속되었고, 급우의 여동생인 줄리아 덴트와 결혼했다. 줄리아는 그의 인생을 붙잡아 준 존재였다. 그랜트는 줄리아와 떨어져 지내는 것을 몹시 힘들어해서 헤어져 있는 동안이면 과음을 하곤 했다.
이후 그랜트의 음주는 거의 중독성으로 발전하여 문제가 되기도 했다. 링컨 대통령은 어느 날 그랜트의 음주와 관련하여 진정서를 받자, 그랜트가 마신다는 그 술을 북부 연방의 다른 장군들에게도 한 베럴씩 보내줄 수 없느냐고 물었다는 일화도 있다.
1846년 미국-멕시코 전쟁에 참전하여 공을 세우기도 했으나 1854년 퇴역하여 가족들과 그럭저럭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인생에 전기가 찾아왔다.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그의 군 경력을 인정한 정치인들이 입대를 권유하여, 그랜트는 대령 계급장을 달고 일리노이주의 한 연대를 지휘하게 된다. 뛰어난 활약을 펼친 덕분에 몇 달 만에 장군으로 진급하였다.
이후 그랜트는 승승장구하여 남북전쟁 막바지에는 1백만 대군을 지휘하는 북군 총사령관으로 승진하였고, 1865년 그 유명한 남군의 로버트 리 장군을 격파하고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이름을 떨치게 된다. 그랜트가 아니었다면 링컨은 미합중국을 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1864년 4월, 링컨이 피격된 후 앤드루 존슨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 하지만, 존슨이 의회의 탄핵을 받음에 따라 당시 여당인 공화당은 그랜트를 영입하였고, 1868년 선거에서 제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대통령 재임 기간 중 정부 각료들의 공공연한 뇌물사건 등으로 전쟁영웅으로서의 이미지는 퇴색하고 인기는 바닥을 쳤으나, 1872년 선거에서 재선되어 미국 국민들조차 의아하게 여길 정도였다. 이런 탓으로 그랜트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 1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대통령 퇴임 후에는 친구가 운영하는 중개회사의 보증을 잘못 서서 파산하는 등 곤궁한 생활을 하였다. 그 무렵 그랜트는 자신의 전쟁 경험을 담은 자서전을 준비하여 죽기 수일 전에 완성하였다. 자서전은 유명 작가인 마크 트웨인의 도움을 받아 사후 출판되었고, 내용과 문장이 뛰어나다는 평가와 함께 공전의 히트를 쳤다. 당시로서는 매우 큰 금액인 50만불을 인세로 아내 줄리아에게 안겨주어 가난을 면하게 해 주었다. 이것이 당초 그랜트가 자서전을 쓴 목적 중 하나였다고도 한다.
전쟁영웅, 타고난 문장가, 아내를 사랑한 남자, 알콜중독자, 최악의 대통령 등 굴곡진 삶을 살았던 그랜트는 1913년부터 50달러 지폐의 모델을 맡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그 역할을 계속하고 있다. 근래 50달러 지폐의 인물을 로널드 레이건으로 교체하자는 법안이 하원에 제출되었다는 외신보도도 있었으나 레이건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상황에서 쉽지는 않아 보인다.
[한국조폐공사 사보 '2016년 9월 화폐와 행복'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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