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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 사회

한국인의 빨리빨리

"한국인은 성격이 급하다." 외국인은 물론 우리 스스로도 인정하는 일종의 국민적 특성이다. 이 '빨리빨리' 문화는 때로 놀라운 효율성과 성장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의 높은 스트레스와 사건·사고의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이토록 우리의 삶에 깊숙이 뿌리내린 속도에 대한 집착은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일까? 나는 그 기원을 수백 년의 농경 역사와 수십 년의 현대사가 중첩된, 한국인만의 독특한 생존 기록에서 찾는다.

 

 

1. '제때'를 놓치면 1년 농사를 망친다 - 농경사회의 유산

 

모든 것의 시작으로 한반도의 자연환경과 농업 방식을 꼽고자 한다. 역사 속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쌀을 주식으로 하는 농경사회 국가였지만, 애석하게도 벼농사에 최적화된 환경은 아니었다.

 

혹독한 환경과 시간의 압박 : 국토의 70%가 산지라 경작지는 좁고, 춥고 긴 겨울과 짧고 집중적인 여름 장마, 그리고 가을 태풍까지, 뚜렷한 사계절은 농부에게 1년 내내 단 한 번의 추수 기회만을 허락했다. 그야말로 이모작은커녕 한 번의 제대로 된 추수를 기대해야 하는 처지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이는 필연적으로 4월 말까지 볍씨를 심고, 6월 초까지 모내기를 끝내고, 태풍이 오기 전인 9월 말까지 추수를 마쳐야 하는, 단 며칠의 오차도 용납되지 않는 빡빡한 시간표 속에서 살아야 했음을 의미한다.

 

'제때'라는 절대 규범 : 이런 한반도의 농경사회에서 '제때'라는 개념은 단순한 시간을 넘어, 한 해의 생존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규범이 되었을 것이라 예상해본다. '제때' 파종하지 못하고 '제때' 수확하지 못하는 것은 곧 굶주림과 연결된다.

 

공동체의 속도, 두레와 품앗이 : 좁은 땅에서 짧은 시간 안에 모든 농사를 끝내기 위해, 한반도의 농업은 필연적으로 강력한 공동체 노동에 의존해야 했다. '두레'와 '품앗이'는 단순히 서로 돕는 미풍양속이 아니라, 마을 전체가 생존하기 위한 필수적인 시스템이었다. 모내기철이 되면 온 마을 사람들이 한 집의 논에 모여 빛의 속도로 모를 심고, 다음 날은 옆집 논으로 이동하는 방식으로 마을 전체의 일을 '제때' 끝냈다.

 

이러한 공동체 시스템 안에서 게으름이나 지체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공동체 전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죄악'이었다. 뒤처지는 사람은 낙오자가 되었고, 공동체의 속도에 발을 맞추지 못하는 개인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빨리, 그리고 함께" 해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 절박함이, 한국인의 DNA에 속도에 대한 강박을 새겨 넣은 첫 번째 원인이다.

 

 

 

2. '한강의 기적'과 생존을 위한 질주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속도 DNA'는 한국전쟁이라는 민족적 비극을 거치며 폭발적으로 발현되었다.

 

잿더미 위의 생존 경쟁 : 전쟁으로 전국토가 황폐화된 상태에서,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길은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그리고 누구보다 빨리 해내는 것뿐이었다. 서구 사회가 수백 년에 걸쳐 이룩한 산업화를 불과 수십 년 만에 따라잡아야 했던 '압축 성장'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하면 된다'는 속도전 : "늦거나 도태되면 회복은커녕 굶주림이 기다리는 환경"이라는 각인된 경험은 당시 한국 사회를 거대한 생존 경쟁의 장으로 만들었다. 모두가 가난했기에, 남보다 한발 앞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만이 가난에서 벗어날 유일한 희망이었고, '한강의 기적'은 바로 이 절박함이 만들어낸 초인적인 속도전의 결과물이라는 생각이다.

 

성공 공식의 대물림 : 이 치열한 시대를 온몸으로 겪어낸 세대가 지금 우리 사회의 노년층이다. 그들에게 '빨리빨리'는 비판의 대상이 아닌, 가난을 이겨내고 성공을 쟁취한 유일하고도 확실한 '성공 공식'이랄 수 있다. 그리고 그 공식은 "부지런해야 성공한다"는 가르침과 함께 자녀 세대에게 고스란히 대물림되어야 할 가치였을 것이다.

 

 

디지털 시대, '빨리빨리'의 가속

 

농경사회의 '제때'와 산업화 시대의 '속도전'을 통해 각인된 '빨리빨리' 문화는, 아이러니하게도 세계 최고 수준의 IT 인프라를 만나 한층 더 가속화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 속도, 주문하면 다음 날 새벽에 도착하는 '총알배송', 1초의 지연도 용납하지 않는 온라인 게임, 그리고 즉각적인 피드백이 오가는 소셜미디어 환경은 우리의 '빨리빨리 DNA'를 더욱 자극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한국인의 '빨리빨리' 문화는 단순한 성격적 특성이 아니다. 그것은 척박한 자연환경과 치열한 현대사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체득된, 한국인만의 독특하고 강력한 '사회적 생존 전략'이다.
이 놀라운 속도감이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만든 원동력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그 이면에 존재하는 과도한 경쟁과 스트레스, 그리고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문화의 그림자 또한 우리가 앞으로 성찰하고 다듬어가야 할 과제인 것 역시 인정해야 할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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