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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 사회

조이(Zoey)가 버뱅크 출신인 이유

넷플릭스의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음악과 영상미 외에도 요소요소에 재미를 심어놓아 호평을 더하고 있다.

 

작품 전반에 걸쳐 대한민국의 문화가 녹아져 있는 것이 큰 특징인 이 작품에서 유독 미국인들이 더 웃는 장면이 있는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그중 하나가 헌트릭스 멤버 조이가 "버뱅크 출신"이라는 설정이 나올 때다.

 

버뱅크는 워너 브라더스, 월트 디즈니, 니켈로디언 등 세계적인 미디어·엔터테인먼트 기업들의 본사가 밀집한 '미디어 산업의 수도'다. 그러니까 조이가 버뱅크 출신이라는 것은 "저는 태어날 때부터 연예계의 중심에서 자랐어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셈. 이를 이해하고 보는 것은 또다른 재미를 준다.

 

이처럼 출신 지역은 캐릭터의 정체성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훌륭한 각본 장치가 되곤 한다. 그래서 자주 활용된다.

 

영화 <록키>의 주인공 록키 발보아는 필라델피아(Philadelphia) 출신이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의 최대 도시 필라델피아는 '미국 독립 선언'이 이루어진 유서 깊은 곳이지만, 현대에 와서는 뉴욕이나 LA에 밀려 '거칠고 투박한 노동자 계급(Blue-collar)'의 도시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영화 <록키>는 바로 이 도시의 정서를 완벽하게 담아냈다. 필라델피아의 뒷골목 출신인 무명 복서 록키 발보아는, 화려하진 않지만 결코 쓰러지지 않는 끈기와 투지로 챔피언에 맞서는 '언더독의 신화'를 써 내려간다. 관객들은 '필라델피아 출신 복서'라는 설정만으로도 그가 가진 불굴의 의지와 계급적 배경을 즉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록키가 필라델피아 미술관 계단을 뛰어오르는 장면은 이제 도시를 넘어, 전 세계적인 희망의 아이콘으로 상징된다.

 

 

 

미국에서 가장 넓은 본토 주(州)인 텍사스는, 카우보이와 총, 광활한 황무지로 대표되는 '개척자 정신(Frontier Spirit)'과 '독립성', '마초이즘'의 상징이다. 그리고 이런 이미지는 작품을 더욱 설득력 있게 만든다.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나 테일러 쉐리던의 <로스트 인 더스트> 같은 '네오 웨스턴' 장르의 영화들은 텍사스를 배경으로 법보다 총이 앞서는 무자비한 세계,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만의 원칙으로 살아가는 인물들을 그린다.

 

관객들은 텍사스라는 배경을 통해, 현대 사회의 편리함 이면에 여전히 살아 숨 쉬는 미국의 원초적인 서부 정신과 마주하게 될 수 있다.

 

 

미국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도시 중 하나인 보스턴은 또 다르다.

 

보스턴 중에서도 아일랜드계 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특정 동네들(사우스 보스턴 등)은 외부인에게 배타적일 만큼 강한 지역적 유대감과 자부심, 그리고 거친 노동자 계급의 정서를 상징한다. 벤 애플렉과 맷 데이먼의 영화들은 이러한 보스턴의 정서를 잘 보여준다.

 

<굿 윌 헌팅>의 천재 윌 헌팅은 자신의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동네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더 편안해하며 보스턴을 떠나지 못한다. <타운>에서는 대대로 은행을 터는 것이 '가업'처럼 되어버린 동네의 폐쇄적인 유대감을, <맨체스터 바이 더 씨>에서는 지울 수 없는 과거의 트라우마가 깃든 고향을 떠나지 못하는 인물의 고통을 그린다. 이들에게 보스턴은 단순한 도시가 아닌, 벗어날 수 없는 운명 공동체처럼 그려진다.

 

 

우리나라의 부산을 떠올려보자.

 

대한민국 제2의 도시이자 최대 항구도시인 부산은, 거친 바다 사나이들의 이미지와 함께 '강한 생활력, 투박함, 뜨거운 의리'를 상징하는 지역으로 꼽힌다. 여기에 특유의 강렬한 억양은 이러한 이미지를 더욱 공고히 한다.

 

곽경택 감독의 영화 <친구>는 부산이라는 공간을 제3의 주인공으로 삼는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대사로 대표되는 끈끈한 우정과 비정한 배신, 거친 남성성의 서사는 부산이라는 항구도시의 배경과 결합하여 엄청난 설득력을 얻었다. 만약 이 영화의 배경이 서울이었다면, 관객들은 지금과 같은 깊은 감정적 동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전라도의 이미지는 드라마 <응답하라 1994>와 영화 <족구왕>에서 적절히 차용됐다.

 

<응답하라 1994>에서 '서태지 팬' 조윤진(도희 분)은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와 함께 거침없는 성격을 보여주지만, 친구들을 살뜰히 챙기는 따뜻한 마음씨를 가졌다. <족구왕>의 주인공 홍만섭(안재홍 분)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특유의 긍정과 유머를 잃지 않는 인물로, 전라도 출신이라는 설정은 그의 캐릭터에 인간적인 매력과 설득력을 더한다.

 

풍요로운 곡창지대를 바탕으로 한 '풍부한 음식 문화'와 '예술적 감각'이라는 대표적인 이미지. 동시에 역사적으로 중앙 권력에서 소외되었던 경험으로 인해 깊은 '한(恨)'과 '저항 정신', 그리고 강한 공동체 의식을 부각시키는데 전라도 만한 곳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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