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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정보/역사

마녀사냥



  성서에는 마법을 사용하는 여자를 살려두어서는 안 된다고 쓰여 있다. 그러니까 마녀는 그 무렵부터 또는 훨씬 전부터 존재해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마녀사냥은 16~17세기에 서유럽 프로테스탄트 국가들과 프랑스·미국의 일부에서만 일어났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중세 가톨릭 시대에도 이단심문이 행해졌고 그 가운데서 마녀의 모습도 나타난다. 그러나 이 시기의 마녀는 마녀로서 처형된 것이 아니라 마술을 사용하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곧 이단으로서 처형된 것이다. 그러다가 15세기말에 이르면 마녀는 단순히 마술을 사용할 뿐 아니라 악마와 계약을 맺었으며 그것 자체가 죄악이라는 생각이 퍼지게 되고 마녀론이 잇따라 주장되면서 마녀사냥이 성행하게 되었다.


  악마와 계약하고 그 부하가 되었다는 최대의 증거는 악마의 집회(사바스)에 참가하는 것이라 한다. 마녀재판의 최대목표는 사바스에 참가했다는 자백을 받아내는 것이고, 일단 자백을 하면 사바스에 있었던 다른 참가자의 이름을 대야 한다. 이렇게 줄줄이 연결되어 차례로 마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럼 최초의 마녀 혐의는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여기에도 다양한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자기가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사람을 계략에 빠뜨리거나(이 경우에는 마녀가 아니라 남자마귀가 많다), 재해나 갑작스런 병이 돌 때 일종의 액땜으로 누군가를 희생시키기도 했다. 결국 평소 미움을 받거나 따돌림을 당하던 사람이 고발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면 재난을 예방하는 조치로서 마녀사냥이 시작된다. 이렇게 되자 제어장치가 없어진 마녀사냥은 더 널리 퍼지기만 하였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사람이 마녀사냥의 희생물이 되었을까?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지만 이단심문의 희생자와 비교하면 훨씬 적다.

  독일 남서부에서 1561년부터 1670년까지 일어난 마녀재판 건수는 842, 그 가운데 20명 이상이 처형된 재판이 24건이다. 한 번에 백 명 이상이 처형된 적도 있었지만 그것은 매우 예외적인 경우이므로 처형된 마녀의 총수는 아마 천 명 가량일 것이다. 독일 전체로는 수천 명에 이를 것이다. 프랑스(프랑스는 가톨릭국가에서 마녀사냥이 행해졌던 유일한 나라이다)도 거의 같은 정도. 그 밖에 스위스와 네덜란드는 수백 명 정도에 불과했지만 스코틀랜드가 4천 명, 영국이 천명에 이른다. 메사추세츠의 마녀사냥도 유명한데, 처형된 사람은 약 20명이다. 이를 모두 합치면 총수는 만 명에서 2만명 사이가 될 것이다. 물론 처형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체포·투옥된 마녀의 수는 그 몇 배에 달한다.


  마녀재판은 물적 증거가 없는 재판이므로 본인의 자백이나 제삼자의 증언이 유일한 증거가 되었다. 또 예방조치로서의 마녀사냥은 아무런 제재장치도 없이 벌어졌을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자숙을 강제하는 사회적 통제작용을 발휘하였다. 희생된 사람은 대개 나이가 많고 힘도 없고 가난한 여성으로서 사회적 약자였다.


  마녀사냥이 행해졌던 16~17세기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이며 종교개혁에 따른 대립의 격화로 인해 사회적으로 불안한 시대였다. 프로테스탄트의 힘이 상당히 강했던 프랑스는 이러한 대립이 특히 심했던 지역이며 더욱이 이들 나라에서는 중세적 공동체의 해체가 진행되고 사회적 통제도 붕괴되고 있었다.


  가톨릭국가라면 이단심문이라는 형태로 이 통제가 유지되었겠지만 프로테스탄트 국가에서는 이단심문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교회에 대립하는 이단이 아니라 신에 대립하는 악마의 문제로 제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악마라든가 마술이라는 존재 자체가 의심받기 시작한다. 17세기가 끝날 무렵 마녀사냥도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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