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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정보/사회

미술 위조

  1992년 영국에서 발간된 한 권의 책, '약올리려고 그렸다(Drawn to Trouble)'가 전 세계 미술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이 책의 저자가 20세기 최고의 미술품 위조가 에릭 햅본(Eric Hebborn)이기 때문이다. 그가 책을 통해 무려 1,000점이나 되는 루벤스, 라파엘로 등의 가짜 명화를 유통시켰다고 밝혔다.

 

  런던(사우스 켄싱턴)에서 출생한 그는 8살때 학교에 불을 질러 소년 감화원에 수용될 정도의 범죄적 재능이 발달한 소년으로, 고미술품 복원/수리 전문가의 수련생으로 들어가면서 탁월한 손재주가 빛을 보기 시작했다. 브뤼겔, 코로, 반다이크 등 여러 거장들의 작품을 복원/수리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작품 스타일을 완전히 습득했고 장난 삼아 그려 본 대가의 모사품을 화랑 주인까지 진품으로 감정할 정도가 되자 본격적인 위조 행각을 벌이게 된다.



 

  그가 만든 대가들의 위조품은 예외 없이 전문 감정가의 진품 판정을 받았고, 경매장을 거쳐 대영 박물관. 워싱턴 국립 미술관 등 세계 굴지의 미술관과 개인 소장가에게 '천문학적' 가격으로 팔려 나갔다. 약 30여 년간 무려 1,000점이나 되는 가짜를 유통시켰어도 문제가 된적이 없던 것은 소더비, 크리스티 경매장이나 미술관들이 자신들의 공신력과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암묵적인 담합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1996년 1월 11일 로마의 한 거리에서 해머로 얻어맞은 듯 두개골이 부서진 채로 발견되면서 전세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더욱이 그가 죽기 불과 몇 주 전, 예술품 위조 방법과 유럽 사회에서 어떻게 위조 드로잉과 페인팅을 유통시킬 수 있는가를 소개한 두 번째 저서 '위조범을 위한 핸드북(The Art Forger's Handbook)'의 출판을 마쳤기에 궁금증이 더해졌다.

 

  세계적인 미술품 위조 전문가로 활약하는 인물들은 에릭 헵본 외에도 존 미야트(John Myatt, 1945∼), 존 드류(John Drew, 1948∼) 등이 있는데 존 드류의 경우 '미술품 위조 사건'이라는 논픽션 서적에도 실제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들의 작품은 진품으로 인정받으며 전세계 주요 박물관과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의심받고 있고, 르네상스시대 거장들의 작품에 위조 가능성에 미술계가 경악한 바 있으며 현재까지 진행형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위작논란은 꾸준히 제기되어오고 있으나, 감정과 평가에 대한 기준, 공신력, 신뢰도가 성숙하지 못한 것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위조의 형태는 완전모작, 부분모작, 모자이크법, 창작적 위작 등 워낙 다양하고 전문적이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감정의 정확도, 절차의 정당성, 최적의 인적구성 등의 적극적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에릭 헵본은 생전에 양심의 가책을 묻는 질문에 '진품'에만 가치를 몰아주는 것은 맞지 않다라는 궤변을 내놓은 적이 있다. 그의 실력이 뛰어난 것은 사실이었겠으나, 예술품과 공산품의 기본적인 차이를 너무 단순하게 외면한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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