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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 사회

적도를 지날 때 행하는 통과의례, 적도제

대양을 항해하는 선원들에게 가장 특별한 순간 중 하나는 아마도 북반구와 남반구를 가르는 보이지 않는 선, '적도'를 통과하는 찰나일 것이다. 배가 이 위도 0도 선을 넘을 때 열리는 이색적인 축제가 바로 '적도제(Equator Crossing Ceremony)'다.

 

거친 파도 위에서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이 독특한 통과의례는 현대 해기사들에게도 여전히 잊지 못할 전통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적도제의 기원: 사투 끝에 빌었던 무사안녕

 

적도제의 기원은 범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과거 돛에 의지해 항해하던 시절, 적도 부근의 '적도 무풍대(Doldrums)'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바람이 전혀 불지 않아 배가 며칠, 때로는 몇 주씩 바다 위에 고립되어 식량과 물이 떨어지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

 

당시 선원들은 이 위험한 구간을 무사히 통과하기 위해 바다의 신 '포세이돈(넵튠)'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는 가혹한 자연 환경에 대한 경외심이자, 생존을 향한 간절한 기원이 담긴 항해 문화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다양한 적도제

 

'왕의 귀환'과 유쾌한 신고식

 

오늘날의 적도제는 종교적 의미보다는 선원들의 결속력을 다지고 긴 항해의 피로를 푸는 전통 축제의 성격이 강하다. 특히 적도를 처음 통과하는 신출내기 선원인 '폴리워그(Pollywog)'가 숙련된 선원인 '셸백(Shellback)'으로 거듭나는 통과의례가 핵심이다.

 

- 넵튠의 등장: 선원 중 한 명이 바다의 신 포세이돈(네오춘)으로 분장하여 배에 오르는 연출을 한다.

 

- 심판과 장난: 처음 적도를 지나는 선원들에게 '재판'을 열어 짖궂은 벌칙을 주거나 오물을 뒤집어씌우는 등의 가벼운 신고식을 치른다.

 

- 축제의 장: 엄격한 위계질서가 존재하는 선상에서 이날만큼은 상하관계가 허물어지며 함께 음식을 나누고 즐거움을 만끽한다.

 

 

 

우리나라의 적도제: "해양 강국으로 가는 관문"

 

한국 해운 산업과 해군 역사에서도 적도제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 해양대학교의 전통: 한국해양대학교와 목포해양대학교 등 해기사를 양성하는 교육 기관의 실습선에서는 매년 적도제가 열린다. 실습생들은 이 의식을 통해 진정한 바다 사나이가 되었음을 자부하며, 항해사로서의 사명감을 다진다.

 

▲ 해군 순항훈련: 대한민국 해군 사관생도들의 순항훈련 중에도 적도 통과는 큰 이벤트다. 함상에서 제물을 차려 바다의 신에게 예를 갖추고 안전 항해를 기원하는 전통적인 제사의 형식을 결합하여 진행되기도 한다.

 

 

부산일보 발췌

 

법과 관습 사이의 유산

 

과거의 적도제가 다소 가혹한 폭력이나 가혹행위로 변질되어 논란이 된 적도 있었으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인권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건전한 문화 행사로 탈바꿈했다. 법률적으로도 이러한 관습법적 전통은 선원법 등 현대 해양법의 테두리 안에서 선원들의 유대감을 강화하는 긍정적인 '비공식적 제도'로 인정받고 있다.

 

적도제는 단순한 장난이나 미신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광활한 바다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깨닫고, 함께 배를 탄 동료들과 운명을 같이하겠다는 약속의 의식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GPS와 인공지능이 항로를 결정하는 21세기에도 적도제가 멈추지 않는 이유는,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선원들만의 '연대'와 '전통'이 적도 위로 흐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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