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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 사회

그림자가 사라지는 날이 있다?

상상해 보자. 한낮의 뜨거운 태양 아래 서 있는데, 발밑에 당연히 있어야 할 그림자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다면?

 

마치 세상이 평면으로 변해버린 듯한 이 기묘하고도 신비로운 경험은 판타지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다. 지구상의 특정 지역, 특정 시기에 실제로 일어나는 마법 같은 천문 현상이다.

 

 

태양이 머리 꼭대기에 서는 순간, '제로 섀도 데이'

 

이 현상의 비밀은 바로 태양의 위치에 있다. 태양이 우리의 머리 바로 위, 천문학 용어로 '천정(Zenith)'을 지날 때 지표면의 물체에는 그림자가 생기지 않게 된다. 태양 빛이 수직으로 내리꽂히기 때문에 그림자가 발밑으로 완벽하게 숨어버리는 것.

 

그래서 이 날을 '제로 섀도 데이(Zero Shadow Day)' 또는 '그림자 없는 날(No-Shadow Day)'이라고 부른다.

 

astron-soc.in

 

하지만 아무 곳에서나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구의 자전축이 약 23.5도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태양은 1년 동안 북회귀선(북위 약 23.4°)과 남회귀선(남위 약 23.4°) 사이를 오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 범위, 즉 열대 지방에 속한 지역에서만 1년에 한두 번 태양이 정확히 머리 위를 지나가는 순간이 찾아온다. 안타깝게도 한국이나 유럽 같은 중위도 지역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현상이다.

 

 

하와이의 '잔혹한 태양', 라하이나 누운(Lāhainā Noon)

 

미국에서 유일하게 열대 기후대에 속한 하와이는 이 현상을 가장 잘 관측할 수 있는 곳 중 하나다. 하와이에서는 이 특별한 순간을 하와이어로 '라하이나 누운(Lāhainā Noon)'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잔혹한 태양(cruel sun)"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머리 위에서 수직으로 쏟아지는 강렬한 태양 빛을 아주 실감 나게 표현한 이름이라 할 만하다.

 

라하이나 누운(Lāhainā Noon)을 촬영한 사진들

 

하와이의 각 섬은 위도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라하이나 누운이 찾아오는 날짜와 시간도 조금씩 다르다. 보통 매년 5월과 7월 전후, 낮 12시 16분에서 43분 사이에 태양이 정수리 위를 통과하며 그림자를 지워버린다.

 

 

그림자가 사라진 세상의 풍경

 

라하이나 누운이 찾아오면 세상은 잠시 동안 기묘한 풍경으로 변한다. 깃발, 전봇대, 그리고 서 있는 사람처럼 수직으로 된 물체의 그림자는 발밑으로 완전히 숨어버려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건물들은 지붕 바로 아래나 발코니 밑에만 얇은 그림자가 남을 뿐, 옆면의 그림자가 사라져 입체감을 잃고 평면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낯선 풍경을 배경으로 '그림자 없는 인증샷'을 찍는 것이 색다른 재미가 된다.

 

 

축제가 된 천문 현상

 

하와이뿐만 아니라 인도, 필리핀, 싱가포르 등 적도 부근의 여러 나라에서도 '제로 섀도 데이'는 흥미로운 이벤트가 된다. 학교에서는 막대기를 세워 그림자 길이가 사라지는 것을 측정하며 지구의 기울기와 계절의 변화를 배우는 생생한 과학 수업이 열리고, 과학관이나 천문 동호회에서는 일반인을 위한 관측 행사를 개최하기도 한다.

 

스카이 게이트 / www.honolulumagazine.com

 

특히 하와이 호놀룰루 시청 앞의 조형물 '스카이 게이트(Sky Gate)'는 라하이나 누운 때 태양 빛이 수직으로 비추면 그림자가 구조물과 완전히 겹쳐지도록 설계되어, 이 날만 되면 수많은 사람이 몰려드는 사진 명소가 되었다.

 

다음에 하와이나 적도 부근의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면, 여행 기간 중에 '그림자가 사라지는 날'이 있는지 확인해 보는 건 어떨까? 태양이 선사하는 가장 강렬하고 신비로운 순간을 직접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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