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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정보/국제

아그레망(agrément)에 관하여

아그레망(agrément)은 '동의'를 의미하는 프랑스어로, 외교 분야에서는 '특정 외교관을 자국에 파견 주재하는 대사로 임명하는 것에 대한 접수국(파견을 받는 나라)의 사전 동의'를 의미한다.

 

쉽게 말해, A국가가 B국가에 자국의 대사로 특정 인물(가령 '홍길동')을 보내고 싶을 때, 이를 공식적으로 발표하기 전에 B국가에 "우리가 홍길동 씨를 대사로 보내려 하는데, 괜찮겠습니까?"라고 비공개로 물어보고 동의를 얻는 절차다.

 

이 절차는 파견국(A국가)이 자국을 대표할 대사 후보를 정하면서 시작된다. 이후 파견국이 접수국(B국가)에 외교 경로를 통해 비공개로 후보자의 약력과 함께 아그레망을 요청하면 접수국은 후보자에 대한 신원을 검토한다.

 

검토에는 접수국 입장에서 후보자가 자국에 부적합한 인물은 아닌지(과거의 반(反)접수국 활동, 첩보 활동 의혹, 부적절한 발언, 중대한 범죄 경력 등)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이 포함된다.

 

 

접수국이 후보자에 대해 동의할 경우 아그레망을 부여했다는 사실을 파견국에 통보하고 만약 반대할 경우 아그레망 요청을 거절할 수도 있다. 이때 거절 이유를 설명할 의무는 없다.

 

외교적 관례상 보통 직접적인 거절 통보보다는, 장기간 답변을 미루는 방식으로 완곡하게 거절 의사를 표하는 경우가 많다고.

 

파견국은 아그레망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해당 인물을 대사로 공식 임명하고 외부에 발표한다.

 

 

 

아그레망 제도는 현대 외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무엇보다 접수국이 자국에 주재할 타국의 외교사절을 수락할지 여부를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국가 주권'의 원칙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제도다.

 

그리고 모든 절차가 '비공개'로 진행되기 때문에, 만약 특정 후보자가 거절당하더라도 양국 간의 공개적인 외교 마찰이나 해당 인물의 체면 손상을 방지할 수 있다. 바꿔 말해 만약 아그레망을 받기 전에 대사 임명을 발표했다가 거절당하면, 이는 심각한 외교적 결례이자 굴욕이 된다는 점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접수국이 꺼리는 인물이 대사로 부임하는 것을 사전에 막아, 불필요한 오해를 막고 양국 간의 원활한 소통과 관계 유지를 돕는데도 의의가 있다.

 

 

이렇듯 아그레망 절차는 대부분 조용히 진중하게 진행되지만, 드물게 그 과정이 외부에 알려지거나 거절 사유가 논란이 되어 외교 문제로 비화하는 경우가 있다.

 

그중 몇 가지 살펴보자면 먼저 바티칸과 프랑스의 대립을 꼽을 수 있다.

 

지난 2015년 프랑스는 가톨릭 신자이자 동성애자임을 공개적으로 밝힌 베테랑 외교관 로랑 스테파니니를 바티칸(교황청) 주재 대사로 임명하고 아그레망을 요청한 바 있다. 이에 대해 바티칸은 공식적인 거절 의사를 밝히지 않은 채, 3개월이 넘도록 아무런 답변을 주지 않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에 대해 프랑스의 가톨릭계 매체인 라크루아는 교황청이 프랑스의 스테파니니 내정을 일종의 '도발'로 여긴다고 보도했는가 하면, 프랑수아 올랑드 정부가 2013년 동성 결혼을 합법화한 데 대한 보복 차원에서 교황청이 스테파니니 지명을 거부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명확한 진실은 알 수 없지만 국제사회에서는 동성애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보수적인 입장에 따라 사실상 아그레망을 거부한 것으로 해석했다.

 

결국 프랑스는 1년 가까이 대사 자리를 비워두는 외교적 대치 끝에 스테파니니의 임명을 철회하고 다른 인물을 지명해야 했고, 이는 대사 후보의 개인적 정체성이 접수국의 가치관과 충돌하여 아그레망이 거부된 대표적인 사례로 남았다.

 

켄 호워리를 덴마크 대사로 지명하는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의 Truth Social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당선인 신분이던 2024년 12월 켄 호워리(Ken Howery) 전 스웨덴 대사를 덴마크 대사로 지명한다고 자신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발표했다.

 

이는 당사자의 직위는 물론 일반적으로 아그레망을 받은 후에 발표하는 것과는 맞지 않는 것으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외교적 관례를 완전히 무시한 행태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국가 안보와 전 세계의 자유를 위해 미국이 그린란드를 소유하고 통제할 절대적 필요성을 느낀다고 주장함으로써 상대국을 완전히 무시하는 태도를 동반했다. 결국 현재까지 덴마크 측의 아그레망 및 공식 부임에 대한 뉴스는 없는 상태다.

 

실제로 미국 대사관 공식 홈페이지와 미국 외교관 인사 현황 자료에 따르면, 현재 주덴마크 미국대사관의 최고 책임자는 마크 스트로(Mark Stroh)로 "차지 드페르(Chargé d'affaires, 대사대리)" 직함을 가지고 있다.

 

결정적으로 AFSA(미국 외교관협회) 공식 트래커에서도 덴마크 주재 미국대사 자리는 "VACANT(공석)"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켄 호워리의 임명은 "pending(대기 중)" 이라고.

 

 

이 밖에 우리나라가 북한과 수교한 덴마크에게 외교적 항의를 표명하는 의미로 덴마크 대사의 아그레망을 보류한 경우(1973년)나, 리투아니아가 '타이완 대표처'라는 명칭으로 대만 사무소를 허용하자 중국은 대사를 소환하고 리투아니아 대사 지명을 거부한 사례(2021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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