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사 정보/역사

1000원 지폐 속 퇴계의 이상향



  조선시대 서원(書院)은 학문의 연구와 선현에 대한 제향을 위하여 지방 선비들이 설립한 사립 교육기관으로, 장수(藏修)와 유학(遊學)을 중시하였다. 특히 서원건축은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천인합일(天人合一)사상에 바탕을 두고 지어졌으며, 서원의 제도적 정착과 건축적 전형(典型)의 완성에는 조선 중기 유학자인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의 역할이 컸다. 그런 퇴계가 수 십년의 고민 끝에 자신이 세상에서 물러나 조용히 살 곳으로 선택한 곳이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土溪)리이며, 퇴계가 직접 건축에 참여한 건물이 도산서당이다. 


  건물은 동서방향으로 세 칸을 지었는데, 길이 7.4m, 폭 2.4m로 일반버스보다 작다. 동쪽 한 칸은 사방이 트인 마루이고, 가운데 한 칸은 온돌방, 서쪽 한 칸은 부엌이다. 마루의 이름은 완락재(玩樂齋)로, ‘즐겨 완상하니 족히 여기서 나의 일생을 마쳐도 싫어하지 않으련다.’ 는 뜻이다. 그리고 온돌방은 암서헌(巖棲軒)으로, ‘학문에 대한 자신을 오래도록 갖지 못했는데, 바위에 깃들여 작은 효험을 바란다.’ 는 뜻이다. 12세에 논어(論語)를 배운 이후 40년을 넘게 유학을 공부한 퇴계가, 57세가 되어 자신이 생을 다할 때 까지 편안하게 즐겨 감상하고, 자신의 학문이 바위에 깃들어 단단해지기를 바라면서 지은 자신만의 이상향이다. 마루 동편에 작은 살평상을 덧대고, 앞에 네모난 연못을 파서 연(蓮)을 심어 정우당(淨友塘)이라 하였으며, 다시 그 동편에 몽천(蒙泉)이라는 샘을 두었다. 마당의 담은 중간을 끊어 싸리문인 유정문(幽貞門)을 두어 건축이 자연과 통하게 하고, 샘 위에 단을 쌓아 매화, 대나무, 소나무, 국화를 심어 절우사(節友社)라 벗하였다.


  퇴계의 사후 제자들은 스승의 도(道)를 기리기 위해 도산서원을 지었다. 그리고 1976년에 준공된 안동댐으로 진입로가 수몰되고 새 진입로가 생기면서 퇴계가 그렸던 이상향은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400년 전, 당대의 유학자가 꿈꿨던 이상향의 모습을 보고 싶다면, 지금 바로 1,000원권 지폐 뒤에 그려진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의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를 보기 바란다. 서당 안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퇴계를 볼 수 있다.


[문화재청 '공감! 문화재' 발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