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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정보/역사

조선의 문화충격, 곤여만국전도



  선조임금의 증손자 낙창군 이탱(?~1761)은 네 번에 걸쳐 연행을 다녀오면서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하였다. 한번은 북경에서 귀국한 뒤, “그림을 그릴 때는 부레풀을 비단 위에 바른 뒤 눈을 들어 잠시 살펴보고는  붓을 움직여 물감을 쓱쓱 칠하는 데 가까이서 보면 매우 거칠지만, 벽에 걸어 보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며 서양화가를 만난 사실을 친구들에게 설명하기도 했다.



  조선사람 중 서양문물을 접한 사람이 낙창군 뿐이랴. 서화를 좋아했던 헌종은 자신의 컬렉션에 서양그림첩을 두었고, 영의정 유한녕은 러시아와 몽골지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의관 김광국은 중국에서 네덜란드 동판화를 구입해 애지중지하였다. 17세기 이후 서양의 존재는 왕족에서 중인에 이르기까지 조선인의 생활 속에 서서히 스며들고 있었다.



   조선사람들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났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개념에 입각하여 중국 중심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1708년 사신으로 북경에 간 최석정이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를 가져오면서 이러한 전통적 세계관이 획기적으로 변화되었다. 1602년 마테오리치가 목판으로 간행한 이 지도를 보고 숙종은 최고의 화가와 지도전문가를 동원해 ‘조선식’ 초고본을 만들도록 했다. 그리고 얼마 뒤 어람본도 제작했다. 초고본(보물 제849호)은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고 남양주 봉선사에 있던 어람본은 소실되어 흑백사진만 전해지고 있으나 2011년 실학박물관에서 복원제작한 바 있다.



  유럽, 아프리카 5대주와 각 나라의 지명, 민족의 종류와 특산물, 천체구조 등 중국을 벗어나 전세계의 모습을 한눈에 보여주는 이 지도는 조선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훗날 고종은 경복궁 집경당을 궁중도서관으로 꾸미면서 곤여만국전도 축소본과 세계지도를 다수 비치해 조선을 변화시킬 개화를 준비했다. 그러나 백성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심어주고자 했던 숙종과 고종의 노력은 끝내 결실을 맺지 못했다.



  최근 우리사회에서는 ‘4차 혁명’의 바람이 불고 있다. 정보통신기술의 융합으로 이뤄지는 차세대 산업혁명이라고 하니 400년전 이 땅에 전해진 서양문물만큼이나 영향력이 엄청날 것이다. 그 성패여부는 우리의 의식변화에 있다는 점을 집경당에 서서 곤여만국전도를 떠올리며 생각해본다.


<곤여만국전도(어람용)>

[문화재청 '공감! 문화재'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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