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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 사회

런던 법원이 '이혼의 성지'가 된 이유

영국 런던은 빅벤과 템스강으로도 유명하지만, 세계 최고 부호들과 글로벌 법조계 사이에서는 아주 은밀하고도 확실한 별명으로 불린다. 바로 ‘세계 이혼 수도(divorce capital of the world)’ 혹은 ‘이혼의 성지’다.

 

수천억, 수조 원대 자산을 가진 글로벌 재벌이나 유명 인사 부부가 파경을 맞았을 때, 이들은 서로 자신에게 유리한 국가의 법원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눈치싸움을 벌인다. 이른바 ‘원정 이혼(Forum Shopping)’ 혹은 ‘이혼 관광(Divorce tourism)’이라 불리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왜 경제적으로 약자인 배우자(주로 아내 측)는 기를 쓰고 런던행 비행기에 오르려 하는 걸까?

 

 

White v White 판례 - 상원은 생계부양자와 가정주부 간의 공정성을 측정하는 척도로 '평등의 기준'을 도입했다 / descartessolicitors.co.uk

 

 

1. 판도를 바꾼 판례: 화이트 대 화이트 (White v White, 2000)

 

런던이 이혼의 성지로 등극한 결정적인 계기는 2000년 영국 대법원(당시 상원 귀족원)에서 내려진 역사적인 판결, ‘White v White’ 사건이다.

 

▲ 과거의 법리: 이 판결 이전까지만 해도 이혼 시 재산 분할은 경제력이 없는 배우자에게 '합리적으로 필요한(reasonable needs)' 생활비 수준만 떼어주는 방식을 취했다. 당연히 부를 축적한 쪽(주로 남편)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 새로운 기준, '동등성 지향(Yardstick of Equality)': 하지만 대법원은 이 사건을 기점으로 완전히 새로운 원칙을 세웠다. "가계를 책임진 사람의 경제적 기여와, 가사와 양육을 전담한 사람의 기여는 본질적으로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실제 이 판결에서 총 자산 460만 파운드 중 아내에게 약 40%인 150만 파운드, 남편에게 60%가 분할되었다.)

 

▲ 50:50 분할의 시작: 결과적으로 결혼 기간 중 형성된 재산에 대해서는 남녀의 역할을 따지지 않고 대략 50:50에 가까운 분할을 기본 원칙으로 삼게 되었다. 이 판결 이후 전 세계의 부유한 전업주부 배우자들은 합당한 몫을 챙기기 위해 앞다투어 런던 법원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2. 런던 법원만의 치명적인 매력 3가지

 

단순히 절반을 나눠준다는 것 외에도, 런던 법원은 부를 쥔 쪽에게는 악몽, 부를 나누고자 하는 쪽에게는 구세주 같은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 끝까지 추적하는 재산 공개 의무: 잉글랜드와 웨일스 법원은 부부 양측에 '완전하고 솔직한(full and frank)' 재산 공개를 엄격하게 요구한다. 조세피난처에 숨겨둔 페이퍼 컴퍼니, 복잡한 신탁(Trust) 자산, 역외 계좌까지 샅샅이 파헤친다. 재산을 은닉하려다 발각되면 괘씸죄가 적용되어 법정 구속까지 당할 수 있다.

 

▲ 평생 보장되는 부양비(Spousal Maintenance): 많은 국가가 이혼 후 자립할 수 있는 짧은 기간 동안만 부양비를 지급하는 '재활(Rehabilitation)' 개념을 채택하고 있다. 반면, 영국은 여전히 전 배우자에게 죽을 때까지 부양비를 지급하라는 '평생 위자료(Joint lives maintenance)' 판결이 나올 가능성이 높은 소수의 국가 중 하나다.

 

▲ 혼전 계약서(Prenup)의 느슨한 효력: 미국이나 유럽 본토에서는 결혼 전 작성한 재산 분할 포기 각서(혼전 계약서)가 법적으로 강력한 구속력을 갖는다. 그러나 영국 법원은 혼전 계약서를 참고는 하되, 그 내용이 한쪽 배우자에게 심각하게 불공평하다고 판단되면 판사의 재량으로 얼마든지 휴지조각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

 

런던이 거대 부자들의 이혼 수도가 된 이야기 / businessinsider.com

 

 

3. '이혼 쇼핑'에 대한 비판과 브렉시트의 나비효과

 

런던 법원의 자비로운(?) 판결은 필연적으로 부작용과 비판을 낳았다.

 

▲ 비판의 목소리: 영국과 큰 연관도 없는 글로벌 부호들이 단지 재산을 크게 떼어내기 위해 영국에 잠시 거주지를 마련하고 소송을 거는 '체리 피킹(Cherry-picking)' 행태가 잦아졌다. 이는 영국 법원의 업무 과부하를 초래했고, 이혼 전문 변호사들만 막대한 수임료로 배를 불린다는 거센 비판을 받았다.

 

▲ 브렉시트(Brexit)와 EU법의 변화: 최근 런던의 독주 체제에 약간의 제동이 걸렸다. 브렉시트 이전에는 유럽연합(EU) 법률에 따라 EU 회원국 중 '가장 먼저 이혼 소송을 접수한 국가(First in time)'의 관할권이 절대적으로 인정되었다. 그래서 부자 남편은 분할에 인색한 프랑스나 이탈리아 법원으로 달려가고, 아내는 런던 법원으로 달려가는 촌극이 빚어졌다.

 

▲ 이혼 관광의 감소 조짐: 하지만 브렉시트 이후 영국이 EU의 사법 체계에서 벗어나면서, 영국 법원에서 받은 이혼 판결이나 재산 분할 명령을 다른 유럽 국가에서 집행하기가 과거보다 훨씬 까다로워졌다. 이에 따라 유럽 출신 부호들의 무조건적인 '런던행'은 다소 주춤하는 추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런던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투명한 사법 시스템을 무기로 '세계 이혼 수도'의 왕좌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사랑이 식어버린 막대한 부(富)의 제국 앞에서, 런던 법원은 '가장 공정한 저울'을 자처하며 지금 이 순간에도 천문학적인 액수의 청구서를 발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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