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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고사리 장마를 아세요?

봄기운이 완연해지는 4월에서 5월 무렵, 제주도에는 며칠씩 궂은비가 내리고 안개가 자욱하게 끼는 날들이 이어진다. 흔히 '장마'라고 하면 한여름의 덥고 습한 호우를 떠올리지만, 제주 사람들은 이맘때 찾아오는 얄궂은 봄비를 가리켜 '고사리 장마'라고 부른다.

 

따스한 봄날에 웬 장마냐 싶겠지만, 이 비가 내리고 나면 제주의 들판과 오름에는 마치 마법처럼 통통하고 연한 고사리가 지천으로 고개를 내민다.

 

이야기꽃 출판사

비를 머금고 피어나는 제주의 보물

 

제주에서는 "고사리는 비가 키운다"는 말이 있다. 건조했던 대지를 촉촉하게 적시는 봄비가 며칠 내리고 나면, 밤새 쑥쑥 자라난 고사리들이 아침 이슬을 머금고 사람들을 기다린다는 것.

 

이 시기의 잦은 비가 고사리의 생육에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주기 때문에 '고사리 장마'라는 이름이 붙었다. 척박한 화산토에서 자라나 맛과 향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제주 흑고사리는 바로 이 장마가 빚어낸 자연의 선물인 셈이다.

 

 

기상학으로 본 고사리 장마의 정체

 

낭만적인 이름과 달리, 기상학적 관점에서 고사리 장마는 뚜렷한 원인이 있는 과학적 기상 현상이다.

 

봄철은 한반도 주변의 공기 세력이 교체되는 시기다. 북쪽에서 내려오는 차가운 공기와 남쪽에서 북상하는 따뜻하고 습한 공기(양쯔강 기단)가 제주도 부근에서 만나 정체전선을 형성하거나, 잦은 저기압을 만들어낸다.

 

이로 인해 초여름의 진짜 장마처럼 여러 날에 걸쳐 흐리고 안개 끼며 비가 내리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실제 기상청 통계상으로도 이 시기 제주의 강수일수는 뭍의 다른 지역보다 눈에 띄게 많다.

 

 

땅만 보고 걷다 길을 잃다: 고사리의 마력

 

고사리 장마가 지나가고 나면 제주 전역은 이른바 '고사리 열병'에 휩싸인다. 여기서 발생하는 의외의 현상이 하나 있다. 매년 이맘때만 되면 제주 경찰과 소방당국에 비상이 걸린다는 점이다. 바로 '고사리 채취객 길 잃음(조난) 사고' 때문이다.

 

풀숲을 헤치고 땅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고사리를 꺾다 보면, 어느새 깊은 중산간 숲속이나 곶자왈 한가운데로 들어가 방향 감각을 상실하게 된다. 여기에 고사리 장마 특유의 짙은 안개까지 겹치면 현지 지리에 밝은 도민조차 길을 잃기 십상이다.

 

오죽하면 "고사리밭은 며느리에게도 안 알려준다"는 우스갯소리와 함께, 무리한 채취를 경고하는 현수막이 섬 곳곳에 나부낄 정도. 의외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그만큼 비를 맞고 자란 제주 고사리의 유혹이 강렬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장필순 <소길1화 (花)>

 

장필순의 목소리로 듣는 제주의 봄

 

이 축축하고도 묘한 생명력을 뿜어내는 제주의 봄을 예술로 담아낸 작품도 있다. 제주에 오랜 기간 정착해 살고 있는 싱어송라이터 장필순의 노래 <고사리 장마>다.

 

특유의 허스키하면서도 쓸쓸한 음색으로 부르는 이 노래는, 안개 낀 제주의 중산간과 며칠째 내리는 빗소리를 고스란히 청각적으로 옮겨 놓은 듯하다. 들뜨고 화사하기만 한 보편적인 봄의 이미지와 달리, 차분하게 가라앉은 습기 속에서 조용히 생명을 잉태하는 제주의 이면을 한 폭의 수채화처럼 그려낸다.

 

 

 

흔히 봄비는 생명수라 부른다. 제주의 고사리 장마는 단순한 궂은 날씨가 아니라, 메마른 땅을 깨우고 숲의 생명들을 길러내는 자연의 웅장한 호흡이다.

 

다가오는 4월과 5월, 제주 여행 중 우산을 써야 하는 궂은 날씨를 마주하더라도 너무 아쉬워하지 말자. 지금 당신이 걷는 그 비안개 너머로, 대지를 뚫고 올라오는 억센 생명들의 조용한 축제가 벌어지고 있을 테니. 장필순의 노래를 가만히 틀어놓고, 이 특별한 비를 온전히 느껴보는 것도 색다른 여행의 묘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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