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이 정체성이 되는 시대에 대하여
최근 정신건강의학과 진료실의 풍경은 분명 달라졌다. 과거에는 증상을 숨기려 애쓰던 환자들이 많았다면, 이제는 스마트폰 화면을 내밀며 묻는다.
“제가 보니까, 성인 ADHD 같아요.”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는 더 이상 낯선 질환이 아니다. 오히려 현대인의 자기 설명서처럼 소비된다. 정신질환의 문턱이 낮아진 것은 환영할 일이다. 문제는 그 문턱이 지나치게 낮아져, 진단명이 하나의 문화적 정체성 자원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폭증하는 숫자, 단순한 각성일까
건강보험 통계에 따르면 국내 성인 ADHD 진단 건수는 최근 몇 년 사이 급격히 증가했다. 특히 20~30대에서 두드러진 상승을 보인다.
물론 이 현상을 곧바로 “거품”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과거 한국은 성인 ADHD에 대한 진단과 치료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던 사회였다. 그동안 발견되지 못했던 환자들이 제도권 안으로 들어온 측면도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동시에 전문가들은 ‘과잉진단(overdiagnosis)’ 가능성 역시 경고한다. 영국의 The Guardian과 미국의 The New York Times 역시 ADHD 진단의 급증과 의료 상업화 문제를 지적해왔다.
정상 범주의 산만함, 번아웃, 우울증으로 인한 집중력 저하까지 하나의 진단명 아래 흡수되는 경향이 생기고 있다는 것이다.
증가 자체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지금 정확히 무엇을 진단하고 있는가?

미디어는 낙인을 지웠지만, 동시에 상품화했다
아동 행동 문제를 다루는 프로그램인 <금쪽같은 내 새끼>는 많은 부모에게 도움을 주었다. 문제 행동을 체벌이나 훈육의 실패가 아니라 발달 특성의 관점에서 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프레임은 동시에 모든 불편한 행동을 ‘치료 가능한 질환’으로 번역하는 문화적 습관을 강화했다.
연예인들의 공개 고백 역시 낙인을 줄이는 긍정적 기능을 했지만, 다른 효과도 낳았다. 산만함과 실수, 자기 관리의 실패가 “저 ADHD라서요”라는 말 한마디로 설명되는 장면이 반복되면서, 진단은 점차 성격적 매력이나 인간미의 코드로 소비되기 시작했다.
질병은 더 이상 숨겨야 할 비밀이 아니라, 설명과 서사의 도구가 되었다.
숏폼 알고리즘과 자기진단 문화
틱톡(TikTok)과 유튜브에는 ‘#ADHD’ 해시태그가 넘쳐난다.
“물건을 자주 잃어버린다.”
“할 일을 미룬다.”
“집중이 잘 안 된다.”
이러한 특성은 많은 현대인이 공감할 수 있는 일상적 경험이다. 그러나 맥락과 기능 손상 여부를 설명하지 않은 채 “3개 이상이면 당신도 ADHD”라고 말하는 콘텐츠는 강력한 확증편향을 유도한다.
ADHD는 단순한 산만함이 아니라, 일상 기능을 지속적으로 손상시키는 신경발달장애다. 진단은 병력 청취, 기능 평가, 감별 진단을 포함한 전문적 절차를 거쳐야 한다.
하지만 1분짜리 영상은 이 복잡한 과정을 생략한 채, 감정적 공명만을 남긴다. 알고리즘은 공감을 증폭시키고, 공감은 곧 자기진단으로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진단은 의료적 판단이 아니라, 정체성 선택의 문제처럼 변형된다.

“내 탓이 아니라 뇌 탓”이라는 안도감
이 현상의 가장 민감한 지점은 여기다.
경쟁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실패를 오롯이 자신의 몫으로 감당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때 진단명은 강력한 해석 틀이 된다.
“내가 게으른 게 아니라, 도파민 조절 문제다.”
“내가 무책임한 게 아니라, 실행기능 장애다.”
ADHD에는 분명 신경생물학적 기반이 존재한다. 적절한 약물 치료와 행동 전략은 많은 환자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한다. 이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진단이 설명을 넘어 정체성으로 고착될 때, 위험이 시작된다.
진단은 책임을 면제하는 도구가 아니라, 새로운 책임의 출발점이어야 한다. 자신의 특성을 이해했다면, 이제는 그 특성에 맞는 전략을 세워야 한다. 하지만 일부 담론에서는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는 자기 고정이 강화되기도 한다.
면죄부가 아니라 이해의 도구여야 할 진단이, 때로는 안도감의 언어로 소비된다.
질병의 소비화, 그리고 그 그림자
이 글은 ADHD의 실재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진짜 환자에게 ADHD는 유행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직장 유지, 관계 지속, 자기 효능감 회복이 달린 문제다.
문제는 질병이 문화적 코드로 소비될 때 발생한다. 진단이 패션처럼 유통되면, 가장 큰 피해는 역설적으로 실제 환자에게 돌아간다.
의심과 냉소가 커지고, 진지한 치료의 필요성까지 가벼워진다.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당신이 찾고 있는 것은 치료인가, 아니면 설명인가?
변화를 위한 개입인가, 아니면 현재를 정당화하는 언어인가?
질병은 정체성이 아니다.
진단명은 액세서리가 아니다.
정신의학은 위로의 산업이 아니라, 기능 회복을 목표로 하는 의학이다.
진단을 소비하는 대신, 진단 이후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 질문만은 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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